다시 돌고, 돌고, 돌고

타임루프 2편

이현수 승인 2021.10.15 11:07 | 최종 수정 2021.10.15 11:15 의견 0

타임루프 2편입니다. 타임루프, 계속해서 반복되는 시간. 인간은 시간의 흐름 앞에 무력하며, 시간의 흐름은 가진 자와 못가진 자에게 모두 공평하게 주어지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이다. 인간은 저 시간의 흐름 앞에 무기력하게 놓였으며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간다. 그리고 그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힘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시간의 흐름을 꺾어서 시작과 끝이 붙은 고리를 만든다? 이건 운명에 대한 반항이요, 인간의 상상력이 저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 존재에 대해 든 아주 작은 반기이다. 보통 최초의 타임루프물로 꼽는 작품은 E. R. Eddison의 1922년 소설 ‘The Worm Ouroboros’이다. 판타지 세계를 다룬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전쟁을 피하고자 전쟁이 일어나기 전 타임루프를 만들어 그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을 택한다.

‘나비효과 The Butterfly Effect’ (2004, 에릭 브레스 Eric Bress J. 맥키 그루버 J. Mackye Gruber, 1시간 54분)
‘나비효과 The Butterfly Effect’ (2004, 에릭 브레스 Eric Bress J. 맥키 그루버 J. Mackye Gruber, 1시간 54분)

사랑하는 여인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과거로의 시간 여행 능력이 있는 주인공 에반 Evan (애쉬튼 커처 Ashton Kutcher)이 계속 반복해서 과거로 돌아간다. 과거로 돌아가 무언가를 바꿀 때마다 미래가 바뀌는데 누군가는 반드시 불행한 결과가 나오고 만다. 하나를 건드리면 다른 쪽이 엉망이 되며 그야말로 ‘나비효과’가 발생해 주인공이 원하는 모두가 행복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이 택한 선택은 ... 정말 가슴이 찡한 남자를 울리는 결말이 준비되어 있다.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요. 사랑한다면 왜 헤어져야 해?’ 사랑하는데 왜 떠나야 했나? ‘나비효과’의 결말은 여기에 대한 완벽한 답이다.

(‘사랑하기에’ [1987, 이정석])

‘나비효과’는 결국 인간이 운명을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무리한다. 시간을 역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 열역학 제 2법칙마냥 인물들 사이에 쌓인 ‘불행’이라는 엔트로피는 반드시 증가한 양만큼 누군가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 불행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려는 주인공의 노력은 결국 실패하고 타임루프를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결국 운명에게 패배한다.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없다.’는 열역학 법칙을 거스르며 과거로 가는 시도는 결국 ‘불행’이라는 엔트로피를 감소시키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다. 누군가가 행복하려면 누군가는 불행해져야한다. 그렇게 모든 불행을 혼자 뒤집어쓴 주인공은 결국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지킨다. (어, 이거 완전 원죄를 짊어지고 하늘로 떠난 지저스 크라이스트 ... ?)

좀 더 최근에 만들어진 ‘해피 데스 데이 Happy Death Day’ (2017, 크리스토퍼 랜돈 Christopher Landon, 1시간 36분)는 운명에 대한 조금 더 가벼운 해석을 보여준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하고, 학교가 끝나면 살해당하고 다시 전 날 아침으로 돌아가고, 우리들도 바쁘게 살지요. 데스데이는 내 친구, 데스데이는 내 친구. 계속해서 자신이 살해당하는 날 아침으로 돌아가는 여대생의 이야기. 앞서 이야기한 로맨틱 코미디 (‘연휴 첫날로 다시 보내줘’ 참조)의 문법에 대한 호러 영화식 해석이다. 주인공 프리 겔브멘 Tree Gelbman (제시카 로데 Jessica Rothe)은 생일에 살해당한다. 그리고 죽을 때마다 계속해서 생일날 아침으로 돌아온다. ‘누가 날 죽였는가?’라는 의문은 ‘아 그동안 내가 참 썅년이었구나.’라는 자기 성찰로 이어진다. 깨달음을 얻은 우리의 주인공은 죽음을 오히려 무기로 사용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죽인 진범을 찾아내게 된다.

‘3X3 Eyes’ (1987 ~ 2002, 타카다 유조 高田裕三)에서도 타임루프는 아니지만 불사인 ‘우无’가 된 주인공 후지이 야쿠모 藤井八雲가 죽음을 무기로 사용하는 참신한 전개를 초반에 보여준다.

그럼 타임루프의 원조 맛집이라 할 수 있는 SF 장르에서 타임루프는 어떻게 사용되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앞서 시간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 인간의 이해 영역을 아득히 넘어선 곳에 있는 두려운 존재라 이야기했다. 신화에서 신과 운명이 차지하던 위치를 SF에서는 시간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대물리학은 이제 시간마저 인간의 인지능력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우리가 운명, 절대적 힘으로 믿었던 시간은 결국 인간이 느끼는 착각일 뿐이었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의견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The Order of Time’ [2019, 카를로 로벨리 Carlo Rovelli]) 그러나 범인들인 우리의 눈에 시간은 아직도 절대적인 존재, 인간 존재 유한성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아우터 와일드 Outer Wilds’ (2019, 알렉스 비첨 Alex Beachum, 론 베르누이 Loan Verneau, 모비우스 디지털 Mobius Digital,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는 2019년에 등장해 모두를 놀라게 한 타임루프 우주 탐사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우주탐사대 ‘아우터 와일드’의 일원이 되어 게임 속 조그마한 태양계를 탐사한다. 탐사의 목적은 고대 종족 ‘노마이’가 남긴 흔적을 쫓는 것이다. 탐사를 하며 노마이의 흔적과 마주친 우리는 이상한 일을 겪게 된다. 22분 주기의 타임루프가 생성되며 매번 게임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타임루프의 원인도 모른 채 우리는 계속 태양계를 탐사한다. 22분의 제한 시간 내에 최대한의 정보를 찾기 위해 같은 시간대를 계속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한다. 그러다 하늘로 눈을 들면 우리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22분의 타임루프는 태양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눈을 뜬 순간부터 태양은 점점 팽창하더니 정확히 22분 뒤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고 온 우주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22분 전에서 눈을 뜨게 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고대종족 노마이는 도대체 이 우주에 무슨 짓을 벌인 것인가? 우리는 한정된 22분의 시간동안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정보를 모아 이 우주의 비밀을 밝혀야 한다. 게임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힌트도 주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조사해야 할지 모든 것을 플레이어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렇다고 쾌적한 플레이경험을 전해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길을 잃기 십상이고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헤매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하는 단서 하나하나, 겪는 사건 하나하나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비밀을 밝혀낼수록 거대한 그림이 완성되어간다. 22분간 야금야금 밝혀낸 단서들은 이 우주의 경이로운 비밀로 우리를 이끌고 이야기는 양자의 세계로까지 들어가, 우주가 만들어진 이후에 생겨났으나, 우주의 나이보다 오래된 우주의 눈으로 우리를 이끌고 22분의 타임루프는 수백억년의 타임루프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인내하며 끝까지 온 플레이어에게 이 게임은 거대한 우주의 존재를, 그야말로 체험하게 만들어준다.

시간은 운명이라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기억을 잃고 매번 타임루프를 시작하는 인물의 이야기는 운명에 갉아 먹히는 유한한 존재의 무기력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운명에 굴복하면 주인공이 아니지, 이 글은 다시 처음으로, 시시프스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위를 끌고 올라가야할 산을 결국 부셔버리고 타임루프를 끊어버리는 시시프스이다.

‘닥터 후 Doctor Who 뉴시즌 9 에피소드 11 하늘에서 내리다 Heaven Sent’ (2015, 레이첼 탈라이 Rachel Talalay, 스티븐 모팻 Steven Moffat). 역대 ‘닥터 후’ 에피소드 중 최고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 낯선 성에서 눈을 뜬 닥터. 나가는 길을 찾고자 하나 이전의 기억은 없고, 뭔지 모를 단서만이 남아있다. 괴물에게 쫓기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데, 주어진 단서는 너무 단편적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쌓여있는 해골들. 도대체 누구의 해골인가? 마지막 순간 닥터는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루프임을. 그리고 이 모든 단서는 자신이 미래의 자신에게 남긴 것이었음을. 기억을 잃고 다시 깨어날 자신에게 이전의 삶을 산 자신이 보내는 메시지라는 것을. 그리고 현재의 닥터는 미래의 닥터가 조그마한 단서를 기반으로 다시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다시 조금 더 발전된 메시지를 남길 것이라 믿고 조그만 단서를 만들고는 목숨을 바친다. 그리고 얼마나 반복됐을지 모를 영겁의 시간이 흐른다.

한 황제가 있었는데 그가 한 양치기 소년에게 묻기를,

‘영원은 몇 초인가?’

그의 물음에 양치기 소년이 답하길,

“순수한 다이아몬드로 된 산이 있습니다. 오르는 데에 1시간이 걸리고 한 바퀴를 도는 데에도 1시간이 걸리는 산입니다. 그리고 100년 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자신의 부리를 다이아몬드 산에 깎습니다 그렇게 산 전체가 깎여나갔을 때, 영원의 1초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넌 아마 이게 ‘정말 대단하게 긴 시간’이라고 생각하겠지.

난 개인적으로, 그건 ‘엄청난 새’라고 생각해.

닥터는 영겁의 시간을 반복하며 결국 부술 수 없다는 벽을 부수고 탈출하며 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닥터는 늘 그래왔듯 불가능해 보이는 고난을 극복하고 이 루프를 깨버린다. 그리고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역시 시리즈 최고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평가받는 시즌 9 피날레 ‘지옥으로 향하다. Hell Bent’로 이어지며, 어떻게 12대 닥터가 1대 닥터부터 이어진 유구한 전통 (모두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고, 어떤 차별과 편견도 없이 모든 생명을 소중히 하는) 속으로 편입되는지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뛰어요, 이 똑똑한 양반, 그리고 닥터가 되어요. Run you Clever Boy, And be a Doctor. ’)

우리에게 희망을,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용기와 사랑을 이야기해주던 닥터들이 그립습니다. 야 이 망할 BBC (매우 심한 욕) 놈들아! 닥터를 다시 돌려놔. 1963년부터 이어진 우리의 닥터를 돌려놓으라고 이 망할 놈들아!

자, 시간은 무엇인가? 현대 물리학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천한 우리는 그것을 체감하지 못한다. 매우 위대한 과학자나 예술가들은 시간의 본질을 궤뚫어 보았다. 상대성 이론부터 자신의 꼬리를 물고 계속 순환하는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Jǫrmungandr까지 우리 인간들은 시간의 시작과 끝을 이어 붙여서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발버둥쳐왔다. (시작과 끝이 확실한 일방향 시간론을 가지는 기독교를 제외하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 혹시 타임루프에 갇힌 것 같은 생각이 드는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타임 루프를 깼던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1993, 해롤드 래미스 Harold Ramis, 1시간 41분)의 필 Phil (빌 머레이 Bill Murray)을 생각해보라. 오늘의 나를 바쳐 내일의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닥터를 생각해보고. 당신의 루프는 다음 루프의 당신에게 분명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루프를 깨고 자유로워질 순간을 기원한다.

(이미지 출처=‘The Butterfly Effect’ (New Line Cinema), ‘이정석 베스트’ (서울 음반), ‘Happy Death Day’ (Universal Pictures), ‘3X3 Eyes’ (講談社),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쌤앤파커스), ‘Outer Wilds’ (Annapurna Interactive), ‘Doctor Who’ (BBC), ‘Peter Capaldi’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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