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성역을 가르며, 너에게 가고 있어

디아블로 II: 레저렉션 Diablo II:Resurrected

이현수 승인 2021.10.07 11:48 | 최종 수정 2021.10.07 11:51 의견 0

2021년 9월 24일. 우리는 보았다. 성역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공포의 군주가 이 땅에 다시 내려오시는 것을. 아 ... 이건 ‘디아블로 III Diablo III’ (2012,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Blizzard Entertainment, 제이 윌슨 Jay Wilson 외)의 캐치프레이즈던가 ... 여하튼,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에서 살아 숨쉬었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바로 그 악마를 다룬 게임, 아니 악마 그 자체인 게임 ‘디아블로 II’의 리마스터와 리메이크 중간 쯤 어디에 위치한 ‘디아블로 II: 레저렉션’ (2021, 비카리오스 비전 Vicarious Vision, 액티비전 블리자드 Activision Blizzard, 로드 퍼거슨 Rod Fergusson 외)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응? 타임루프 2편 나올 차례 아니냐고요? 아니 지금 공포의 군주께서 강림하시는데 타임루프 따위가. 그리고 ‘디아블로 II’는 그 자체로 타임 루프 아니 미래로 향하는 타임머신입니다. 여기 몇몇 분들의 증언을 들어보시죠.

김 모군. ‘2001년 어느 날 PC방에서 디아블로II CD를 넣었어요.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탄약고 초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더라고요.’

장 모군. ‘수능날 아침이었어요. 전 절망의 평원에서 훨윈드를 돌고 있었죠.’

윤 모 양. ‘그냥 가볍게 디아II 한 판 시작했어요. 엄마가 실종 신고를 내고 경찰 아저씨들이 PC방으로 절 찾으러 올 때까지 일주일이 걸렸죠.’

농담 같다고? 그럼 둘 중의 하나이다. 당신은 2000년 초반 대한민국에 살아본 적이 없거나, 공포의 군주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았던 소수의 행운아였거나.

‘디아블로 Diablo’ (1996, 블리자드 노스 Blizzard North,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빌 로퍼 Bill Roper 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1995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는 ‘워크래프트 II Warcraft II: Tides and Darkness’ (1995,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론 밀러 Ron Millar’를 내놓고 차기작 ‘스타크래프트 Starcraft’ (1998,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크리스 멧젠Chris Metzen 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콘도르 게임즈Condor Games라는 회사가 ‘디아블로’라는 턴제 로그라이크 Rogue Like 게임을 들고 블리자드를 방문한다. (로그라이크란? 1980년 게임 ‘로그 Rogue’에 기반한 게임들로 그 규칙은 다음과 같다. 무작위 생성 던전, 세이브 로드 불가, 그래서 선택과 결정이 매우 중요, 한걸음 한걸음에 신경 써야 하는 엄청난 난이도, 죽으면 모든 것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

바로 이 게임이 오리지널 ‘로그’이다. 1980년에 만들어진 이 게임은 2020년 최고 화제작 ‘하데스 Hades’ (2020, 슈퍼자이언트 게임즈 Supergiant Games, 그렉 커세빈 Greg Kasavin)까지 이어지며 그 장르의 생명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비디오게임 역사상 게임 제목 자체가 장르의 이름이 된 경우는 딱 세 번 있다. ‘로그 라이크’ (‘로그’) ‘메트로배니아 Metro-Vania’ (‘메트로이드 Metroid’와 ‘악마성 드라큐라 Castle Vania’) ‘소울라이크 Souls Like’ (‘다크소울 Dark Souls’). 여하튼 이 턴제 로그라이크 게임이 마음에 들었던 블리자드는 (당시 턴제 게임을 개발하다 엎었다고 한다.) 무리를 해서 콘도르 게임즈를 인수하여 블리자드 노스라는 스튜디오로 편입시키고 본격적으로 ‘디아블로’ 개발을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인 한 수를 두게 된다. 블리자드 본사는 이 게임의 전투를 턴제가 아니라 실시간을 변경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자 턴제 로그라이크 RPG의 빠돌이들이었던 노스의 멤버들이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 본사 인원들 앞에서 입증하기 위해 부랴부랴 실시간 전투 프로토 타입을 완성한다. 주인공이 칼을 들고 있고 저 앞에 스켈레톤이 있다. 마우스 커서를 옮겨 스켈레톤을 클릭하면 주인공이 걸어가 칼질을 한다. 툭탁툭탁 전투가 벌어지고 스켈레톤이 와르르 무너진다. 이 장면을 본 노스의 턴제 빠돌이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뭐야 이거 개 쩔잖아!’ 새로운 장르를 정의하는 핵 앤 슬래쉬 Hack and Slash 액션 RPG 탄생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실시간 핵 앤 슬래쉬 액션 전투 RPG로 탄생한 ‘디아블로’는 로그라이크 장르에 대한 아직까지도 가장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해석으로 남았다.

자, 이제 스토리 이야기를 해보자. 노스 인원들은 그저 던전 탐사 로그라이크를 만들고 싶었을 뿐 스토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디아블로’의 스토리와 그 미치도록 어둡고 암울한 톤 앤 매너를 만든 건 블리자드 본사 측 인원들이다. ‘디아블로’의 스토리를 간단히 하면 다음과 같다. 악마가 인간을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인간은 악마의 현신이 되어 세상에 지옥을 연다. 그리고 그 악마를 무찌르기 위해 영웅들이 모인다. 마침내 악마를 무찌르지만 그 영웅 역시 악마의 유혹에 ... 미친 듯이 암울한 이 스토리를 살리기 위해 게임의 톤 앤 매너 역시 미친 듯이 암울하다. 특히 첫 보스로 만나게 되는 (못 만날 수도 있다. 임의 생성 던전과 퀘스트가 이 보스를 생성 안 할 시에는 못 만난다.) 부쳐 Butcher의 경우 수많은 플레이어의 뇌리에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닫힌 문을 열면 보이는 지옥과 같은 광경. 갈고리에 걸린 인간들의 시체. 가운데에서 고기를 다듬고 있는 괴물. 괴물이 문을 연 당신을 돌아보고는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Ah! Fresh Meat!’ 그리고 저 괴물이 고기칼을 들고 미친 듯이 따라온다. 저 놈의 이동 속도는 플레이어의 이동속도와 똑같이 세팅되어있다. 아무리 도망가도 계속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온다.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저 괴물에게 따라잡히고 순식간에 다진 고기가 되어버린다. 이 암울하고 어두운 이야기에 어울리는 미술과 음악은 준비되었고, 그럼 게임 시스템과 플레이 경험에서 이 미치도록 어두운 환경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 고민하던 개발진은 한 가지 묘수를 낸다. 몬스터들을 미치도록 호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디아블로’의 몬스터들은 거의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주인공을 발견하면 미친 듯이 달려든다. 아니 뭐 전투를 하려면 준비도 해야하고 전략도 짜야하고 포션도 먹어야 하는데 이 괴물 놈들이 미친 듯 달려들어 우와와와 퍽퍽퍽퍽하면 어느새 우리 주인공은 시체가 되어버린다.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것이 조심스럽던 로그라이크의 문법은 이런 식으로 핵 앤 슬래쉬로 성공적으로 이식된다. 그리고 정말 지옥의 한 가운데 떨어져있다는 느낌이 그대로 플레이어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된다.

‘디아블로’의 성공 이후 블리자드는 바로 속편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그렇게 세상에 나온 것이 악마의 게임, 아니 악마 그 자체인 ‘디아블로 II’이다. ‘디아블로II’는 전작의 스토리를 이어가며 분위기도 이어가나, 극단적으로 어둡고 절망적인 1편의 분위기를 조금 완화시켜 ‘지옥에서 허덕거리는 필멸자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악마를 잡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는 용사들의 싸움’ 정도로 톤 다운시킨다. 그리고 게임 역사상 최고의 중독성을 자랑하는 루팅 Looting 시스템을 탑재한다. ‘디아블로’에서 기초를 갖춘 루팅 시스템, 즉 계속해서 더 좋은 아이템을 얻어내기 위해 끝없이 전투를 하며 아이템을 파밍하는 이 시스템은 ‘디아블로 II’에서 완벽하게 자리 잡는다.

총, 총, 총, 더 많은 총, 더 강한 총, 별의 별 총을 얻기 위해 쏘고 또 쏘는 루트 슈터 Loot Shooter의 최신작 ‘보더랜드3 Borderlands3’ (2019, 기어박스 소프트웨어 Gearbox Software, 2K 게임스 2K Games, 폴 세이지 Paul Sage)뿐 아니라 현대의 모든 루트 게임은 모두 ‘디아블로 II’가 만들어낸 루팅 시스템 하에 완성되었다.

이 완벽하고 중독적인 루팅 시스템은 ‘디아블로’와 ‘디아블로 II’의 핵심 디자이너인 데이비드 브레빅 David Brevik과 에릭 셰퍼 Erich Schaefer가 만들어냈다. 회색, 파란색, 초록색 그리고 황금색으로 구별된 아이템 등급. 각 등급별로 기가 막히게 능력들을 배치하여 만들어낸 절묘한 밸런스.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확률에 따라 나타나는 아이템은 슬롯 머신의 작동 원리를 모방한 것이며, 그 아이템의 능력으로 캐릭터가 강해지고, 캐릭터가 강해지면 더 강한 몬스터를 쉽게 잡을 수 있고, 그럼 더 강한 아이템이 나타나고, 그럼 더 강한 몬스터를 잡을 수 있고 ... 이 완벽한 보상-학습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아이템 루팅은 엄청난 중독성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루팅 시스템을 첨예하게 갈고 또 갈아 회색의 보통 아이템을 이용해 황금색의 전설 아이템을 뛰어넘는 엄청난 성능의 아이템을 플레이어가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물론 엄청난 시간을 투자한 실험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크래프팅 시스템은 플레이어들이 이 악마 같은 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그 외 아이템이 바닥에 떨어질 때 사운드를 사용하는 방법, 아이템을 얻자마자 그 능력을 바로 확인할 수 없는 감별 시스템 등 ‘디아블로 II’가 만들어낸 중독적인 루팅 메카니즘은 굉장히 풍부하며 인간의 모든 감각을 자극하게 설계되어있다.)

웹진 코타쿠Kotaku는 2021년 4월 이 둘을 만나 ‘비디오 게임에서 루팅은 왜 그렇게 중독적인가?’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https://kotaku.com/why-video-game-loot-is-so-addictive-according-to-the-c-1846695147)

거기서 왜 아직도 많은 게임들이 ‘디아블로 II’의 루팅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들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게 아직도 먹히니까.’ ‘디아블로 II’의 루팅 시스템은 현 비디오 게임판의 가장 악명 높은 랜덤 박스 Random Box 시스템의 근간이 되어주었다. 플레이어들이 게임사에 현금을 지불하고 확률적으로 아이템을 얻는 시스템 말이다. EA의 ‘피파 Fifa’ 시리즈, NC의 ‘리니지 Lineage’ 시리즈가 악랄한 랜덤 박스 시스템으로 아주 악명이 높고 이 회사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가고 있다. 이 랜덤 박스 시스템은 도박과 다를 바가 없어서 현재 영국 의회는 랜덤 박스 시스템을 도박으로 보고 규제할 것인지를 놓고 검토 중에 있다. 내년에 그 결과가 발표될 것이며 랜덤 박스 시스템을 도박으로 인정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이 악명 높은 랜덤 박스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으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질문을 받자 이 두 베테랑 개발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어떠한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우린 사람들 지갑에서 돈을 털려고 그 시스템을 만든 것이 아니다. 다만 몬스터 한 마리만 더 잡자 라는 중독적인 느낌이 좋았을 뿐이다. 나와 내 캐릭터가 성장한다는 그 느낌 말이다.’

‘디아블로 II’의 루팅 시스템이 너무나 뛰어나기에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지만, 루팅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엔드 콘텐츠, 즉 게임을 모두 클리어하고 난 뒤 계속해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설계된 것이다. 7개의 클래스 (오리지널 5개 + 확장판 2개) 중 하나를 골라 지상에서 지옥 밑바닥까지 악마 삼형제인 증오의 군주 메피스토, 공포의 군주 디아블로, 파괴의 군주 바알을 쫓는 여정은 굉장히 매력적이며 빠져드는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각 클래스별로 확실하게 다르게 설계된 게임 플레이 경험과 ‘반복’과 ‘악순환’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실제 수없이 반복해서 플레이해야 하는 이 게임의 플레이 스타일과도 잘 맞아떨어지며 기묘한 느낌을 준다. 판타지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창조 신화부터 멸망 신화까지 엄청나게 방대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나 게임의 스토리를 따라가는데 있어 그런 것들은 몰라도 되며, 세 악마를 쫓는다는 목적을 설정한 뒤 실제 플레이하면서 한 명씩 그 뒤를 따라 잡는 스토리 구성도 매우 뛰어나다. 게임의 장르 특성상 멀리서 플레이어의 여정을 바라보는 게임이라 캐릭터 묘사와 인간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큰 줄기의 이야기를 시원시원하게 따라가며 상황의 변화를 게임의 배경 변화와 연결시키면서 플레이하는 재미가 확실한 작품이다. 20년 전 당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나? 그 시절이 그립다면 오늘 다시 성역으로 돌아가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아직 이 게임을 못 해보았다면 ...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중독되거나 그냥 살거나.

(이미지 출처=‘Diablo II: Resurrected’ (Activision Blizzard), ‘Diablo’ (Activision Blizzard), ‘Rogue’ (Epyx), ‘Borderland 3’ (2K G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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