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티베트 29편] 우뚝 솟은 티베트의 자존심 간체종(江孜古堡)

백민섭 승인 2021.07.05 13:22 | 최종 수정 2021.07.05 13:34 의견 0

냥추계곡에 든든히 자리 잡은 간체는 1951년 중국의 침략이 있기 전까지 티베트의 제 3의 도시로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했다.

예전에는 에베레스트를 넘어 인도, 네팔을 오가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관문이었고, 근세에는 영국군이 티베트를 침략했던 길이며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할 당시 지났던 길이기도하다.

역사적으로도 중국의 영향이 가장 적은 도시 중 하나라는 이유만으로 가볼 만한 도시였다. 그러나 세월은 잔인하다. 이 도시도 예외 없이 중국의 이주정책의 폐해를 벗어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대규모로 유입된 한족들이 큰 거리와 요지를 차지하고, 중국식으로 도시를 정비했다. 영웅로(英雄路)를 중심으로 시가지는 티베트풍이기는 하나 중국의 냄새가 물씬하다. 티베트 사람들의 인간적인 도시풍경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슬픈 현실 속에서도 아직까지는 여전히 남부티베트의 중심지 중 하나다.

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쭝산(宗山)의 '간체종(江孜古堡)'
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쭝산(宗山)의 '간체종(江孜古堡)'

간체(江孜)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쭝산(宗山)의 ‘간체종(Gyantse Dzong, 江孜古堡)’이다. 간체의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이 성은 14세기에 축조된 요새로 티베트에서는 흔치않은 비종교적 유적지의 하나다. 원래는 얄룽(Yarlungs)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팔코르첸(Palkhortsen)’의 궁이었는데 나중에 이 지방의 군주였던 팍파 펠장포(白闊贊普)가 요새로 개조하여 간체종이 되었다.

이 요새는 네팔의 쿠르카(Kurka)왕국과 라다크(Ladakh)왕국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깎아지른 언덕에 왕관처럼 자리한 성은 보기에도 위압적이고 빈틈이 없어 보인다.

간체종은 밖에서 볼 때는 흠잡을 때가 없는 훌륭한 요새지만 안에서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깨지고 부서지고... 1904년 영국군과 격전, 그리고 문화혁명기 홍위병에 의해 파괴된 후유증으로 여기저기 역사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채 허물을 드러내고 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곳은 영국군과의 항전을 추모하는 기념비 앞. 어느새 1904년 그 치열했던 전쟁 속으로 빠져든다.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힘겨루기였던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 한창이던 1903년 겨울, 러시아의 남진을 우려한 영국군이 간체를 침공하자 이 지역 군인과 민간인들이 강력한 저항을 한다. 이로 인해 영국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그러나 1904년, 허즈번드(F. E. Younghusband)대령이 이끄는 영국군이 재차 침공한다. 이번에는 티베트의 일방적인 참패로 끝난다. 영국군의 근대식 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티베트 군인과 민간인들은 돌과 흙을 무기로 두 달이 넘게 결사항전을 하다가 결국 절벽으로 모두 뛰어내려 순국했다.

抗英烈士跳崖處 기념비
抗英烈士跳崖處 기념비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간체종을 ‘영웅성(英雄城)’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기념비에 새겨진 '抗英烈士跳崖處'라는 내용처럼 영국군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로 뛰어내렸다는 절벽은 50여 미터가 넘어 내려다보기에도 아찔하다. 섬뜩함과 함께 비장함이 느껴진다.

간체종은 현재 중국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티베트 자치구에서도 애국주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어 추모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중국정부는 티베트민족이 중국을 수호하기 위해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고 왜곡하고 그 이름을 ‘영웅성’이라고 칭했다.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그러나 폐허의 황량함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보다 용감했던 티베트 사람들의 지조와 용맹함이 잊혀질리 있을까?

넨추하평야와 간체시내 모습. 맨 뒤가 펠코르초드
넨추하평야와 간체시내 모습. 맨 뒤가 펠코르초드

간체의 또 다른 상징은 단연코 펠코르초드(Pelkor Chode, 白居寺)다. 간체성 서북쪽 뒤 코앞에 위치해 있다.

사원을 중심으로 삼면을 산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티베트 최고의 불탑과 건축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불교사원이다.

쭝산(宗山)에서 빠져나와 펠코르초드로 길을 잡는다. 산에서 내려오기만 하면 사원은 그리 멀지않다. 간체종을 오른쪽으로 끼고 약 10분도 정도 걸으면 된다.

시내에서 사원으로 이어진 길을 걸으면 다양한 모습으로 고성이 따라온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영웅성이라 할 만한 기개가 느껴진다.

간체종과 간체 전경
간체종과 간체 전경

간체 시가지에서 사원으로 이어진 길가는 모두 상점들이 점령했다. 가게마다 비슷비슷한 물건들이 잔뜩 전시돼 있다. 열이면 열 모두 이주한 한족이 주인이라고 보면 된다. 2017년도에 이 중앙로가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펠코르초드 정문 앞까지 아스팔트 2차선 도로가 깨끗하다. 그 많은 좌판과 행상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중국정부는 도시를 정비하면서 우선적으로 티베트인들에게 무상 또는 저렴하게 상가를 분양해 주었다고 한다. 소수민족 동화정책의 하나로 기득권 보호와 생계지원차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인이 장악했다. 생각해보면 낯 뜨거운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멀쩡한 남의 나라를 힘으로 지배하는 것도 그렇고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사변을 통해 티베트인들을 학살하고 억압했던 이들이 집도 지어주고 먹을 것도 챙겨주는 것이 과연 선한 일이던가? 말쑥하게 단장한 간체보다 칙칙하고 먼지 폴폴하던 예전 모습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나그네의 감상이다.

펠코르초드(白居寺) 앞 중앙로
펠코르초드(白居寺) 앞 중앙로

왁자지껄 생기가 넘치던 길거리에서 좌판이 사라지고, 환하게 웃던 아름다운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많고 화려했던 티베트식 잡화와 농기구, 온갖 장신구 등을 만지작거리며 구경하던 쏠쏠한 재미가 살아진 것은 아쉬움이다. 더구나 일단 비싸게 부르고 깎아주는 상인들을 상대로 바가지를 안 쓰려고 독하게 흥정하던 일이 추억이 돼버릴 줄은 미처 몰랐었다.

펠코르초드는 정문 앞에 ‘팔초’(Palcho)라는 입간판이 있어 찾기 쉽다.

정문 입구부터 좌우로 길게 늘어선 마니차(摩尼車- 불교 경전을 넣은 통)는 대법당 앞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 불교경전을 넣어 둔 마니차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죄업이 하나씩 사라진다고 믿는

순례자와 여행자들로 입구는 늘 붐빈다.

펠코르초드(白居寺) 입구, 경전통((摩尼車) 통로
펠코르초드(白居寺) 입구, 경전통((摩尼車) 통로

정문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사원의 사방에 둘러쳐진 성벽과 스카이라인이다. 그 옛날 이웃한 부탄과 네팔의 잦은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서 축성되었다는데 사원이 아니라 마치 철옹성 같다. 문화혁명 때는 인민해방군이 공중폭격으로 사원을 파괴했다고 하니 유명한 만큼 고초도 많았다.

산언덕 중앙에 지킴이처럼 위치한 샬루파승원 (펠코르초드 뒤쪽 산 중턱의 건물)과 오른쪽 언덕에 있는 대형 탕카(Thang ka-주로 면직물 위에 그린 티베트 불교화. 괘불화라고도 한다)를 거는 벽인 고쿠 트람사 (Goku Tramsa-음력 4월에 석가모니불의 대형 불화(佛畵)를 거는 곳)가 건재하다.

펠코르초드와 어울린 고쿠 트람사(괘불대, 왼쪽 위)와 (가운데) 샬루파승원(가운데)-
펠코르초드와 어울린 고쿠 트람사(괘불대, 왼쪽 위)와 (가운데) 샬루파승원(가운데)-

정문을 중심으로 정면에 붉은색의 대법당(安全寺, Tsuklhakhang)이 있다. 1층에는 대법당과 본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삼세불(三世佛)이 안치되어 있다. 2층에는 큰 벽화와 입체 만다라가 있고, 대법당의 왼쪽에는 백색의 거대한 불탑(스투파)이 있다. 이것이 유명한 간체의 대탑으로서 펠코르초드, 또는 간체쿰붐으로도 불린다.

펠코르초드(Pelkhor chode)는 건축양식이 독특하고 회화의 예술성이 뛰어나 예술가와 여행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탑이다. 펠코르초드사원은 9세기 팔코르첸(Palkhortsen-9세기경 얄룽 왕조의 마지막 왕)의 집권 시기에 지어졌다. 창건 당시에는 샤카파(薩迦派, Sakya pa)에 속하였으나 15세기 들어 다양한 종파의 사원이 펠코르에 모여들어 상당한 규모로 성장했다. 크고 작은 불상을 10만개나 모셔 놓았기 때문에 ‘십만 불탑’이라고도 한다. 탑이 바로 사찰이며 티베트의 탑 중 최고로 알려져 있다.

펠코르초드(Pelkhor chode) 전경
펠코르초드(Pelkhor chode) 전경

꼭대기에는 금색의 상륜(相輪- 불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이 있고 그 아래에 거대한 부처의 눈이 그려져 있다. 펠코르초드는 높이 34m에 이르는데, 내부의 불상과 벽화를 보면서 오를 수 있다.

탑은 기단을 포함해 총 9층인데 4층까지는 4면8각형이며, 5층부터 탑 꼭대기까지는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층층이 모두 108개의 전당이 있는데, 전당 내의 벽화와 불상이 모두 중국, 네팔, 인도의 다국적인 종교의 특색이 융합되어 독특한 모습을 자랑한다.

간체는 가장 티베트스럽지만 역사적으로는 가장 비운의 도시였는지도 모른다. 네팔이 수백 년 동안 침입을 해도 거뜬히 막아주었던 간체종이 영국의 근대식 무기 앞에 무릎 꿇으면서 ‘라싸조약’(1904년에 영국과 티베트 사이에 맺은 조약. 티베트가 친(親)러시아 정책을 취하자, 러시아 세력의 티베트 침략를 염려한 영국이 티베트의 통상 문호 개방과 영국의 보호국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주 내용)이 체결되고, 이후 근 반세기에 이르는 동안 영국제국주의 밑에 있게 된다. 이때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티베트는 1950년 중국의 침략을 당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국의 영향을 덜 받았다는 간체의 자부심도 이젠 간체종의 ’중국중요문화재‘지정으로 명성에 흠이 났다. 오직 홍위병의 서슬에서 빗겨 난 펠코르초드의 아름다움만이 고대 간체를 상징하고 있다.

간체 티베트족 거주
간체 티베트족 거주
티베트 집단거주지 골목
티베트 집단거주지 골목

사원 입구에서 시작하는 티베트 전통마을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 있다. 이곳 역시 개발붐으로 상당부분 훼손됐지만 도심에 남아 있는 전통구역 가운데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흙벽돌로 된 2~3층의 집들은 대체로 벽에 흰색 회칠을 해놓았고 대로는 납작한 돌로 조성되어 있다. 길거리에는 주인 없는 개들이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바닥에는 삼삼오오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들, 빨래하는 아낙들도 볼 수 있다.

1층은 전통방식으로 외양간이나 마구간으로 사용하는 집도 있지만, 골목과 집 사이를 대충 막아 외양간으로 사용하는 집도 보인다.

가끔은 담과 벽에 ‘쭤(야크나 소똥을 칭커짚과 이긴 덩어리)’를 붙여놓은 풍경도 볼 수 있다. 요즘은 시골이 아니면 보기 힘든 풍경이다.

티베트 고원에는 소나 염소, 양 등 다양한 가축이 있지만, 야크가 전체 가축의 40%를 차지할 정도다.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고원 지역 티베트에서 돈을 들이지 않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야크 배설물은 땔감으로 주로 사용한다.

가축을 끌고 장소를 옮겨가며 살던 유목민 시절에 야크 배설물은 더 없이 편리하고 구하기 쉬운 연료였을 것이다.

쭤는 만드는 형태도 다양해서 야크똥이라는 불편한 느낌만 아니면 나름 재미있는 풍습이다.

볕이 잘 드는 벽이나 담에 붙여놓았다가 마르면 불쏘시개로 사용한다. 아직도 티베트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연료다.

흙과 돌을 섞어 지은 티베트의 전통가옥. 집집마다 대문에는 복을 기원하는 문양과 바람에 휘날리는 오색 룽다는 신의 굽어 살핌을 갈구하고 있다. 척박한 땅을 일구고 사는 티베트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엿보인다.

저작권자 ⓒ OBSW,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