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스무 번째] 죽거나 낫거나

김원경 승인 2021.04.29 15:51 | 최종 수정 2021.04.29 15:57 의견 0

이번 독서 모임 장소는 우리 찻집이다.
생존 영어에만 의지해 기초 어휘만 입에 달고 살다 보니 더 바보가 되겠구나 싶어 시작한 독서 모임. 다섯 명의 한국 여성들이 멤버다. 

한국 책을 주로 고르는데 한국 종이책은 제때 구하기 어려워 휴대폰으로 읽는다. 몇 페이지 읽었을 뿐인데 벌써 눈이 시려 눈물이 난다. 한국에 전자책 전용 뷰어를 주문했으나 리튬 베터리는 비행기에서 폭발할 수 있다고 배송을 거부했다. 이번에도 다 못 읽어 가면 모범생 언니가 눈총을 쏠 게 분명하다.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초반의 진지한 10분만 어떻게든 잘 버티면 된다. 

'이번 주 책은 어땠어요?'
언니가 눈에 총을 장전하고 노트에 깨알같이 적어온 생각을 먼저 펼친다. 숙제해온 사람은 맞장구를 치고 나는 전에 읽어두었던 책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나온 몇 가지 신공을 발휘하여 선방하고 있다. 고상하고 지적인 10분이 지났다. 누군가 살짝 옆길로 샌다. 
남편이 비염 때문에 고생해요.
이제 살았다. 이제부터는 여성주의 토론의 진수, 수다의 시간이다. 

A woman's lot is to suffer.
남편이 애먹인 이야기, 자식이 속끓인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주제다.

비염에 걸린 남편이 페밀리 닥터에게 2년 반 전에 치료를 신청했는데 며칠 전에, 그러니까 무려 2년 반이 지나서 치료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2년 반'에 놀랐지만 2년 반이나 지났어도 연락해준 게 어디냐고 다들 칭찬했다. 

캐나다 오고 처음엔 정말 쇼킹했다.
암 환자가 수술을 기다리다 지쳐 죽었다는 이야기는 흔했고, 차례를 기다리다 저절로 병이 나은 이야기는 널렸다.
아들과 록 밴드를 함께하는 보컬 친구도 디스크에 걸려 한동안 무대에 오르지 못했는데 수술을 기다리다 지쳐 대마초로 견디고 있다. (캐나다는 대마초가 허용된다) 

미국은 보험이 없어 죽고 캐나다는 기다리다 죽는다. 약국에서 부러진 이빨을 붙이는 본드나 마취 연고 같은 걸 파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당장 죽을 것 같지 않은 병은 기다려야 한다. 언젠가 딸아이가 복통이 심해져서 응급실에 갔다. 발을 동동 구르며 접수했더니 줄을 서야 한다고 했다. 줄을 선 환자들의 길고 긴 대열을 보고 아연했다. 게다가 위급한 환자가 오면 줄을 건너 뛰니 한없이 밀릴 수도 있었다. 줄 중간쯤에 손바닥 한가운데 큰 못이 박힌 남자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딸아이가 이제 복통이 좀 가라앉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냥 집에 왔다. 

우리는 패밀리 닥터를 구하느라 5년을 기다렸다. 어지간한 상처는 타이레놀 먹거나 된장 바르고 견뎠다. 여러 차례 독촉 전화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자 한국식 읍소 작전을 펴기로 했다. 
동네 병원 응급센터에서 의사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가엽고 젊은 프랜치계 의사가,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어깨에 발을 질질 끄는 남편을 매달고 온 동양 여자의 안타깝고 긴 아양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빠른 대기자 순번에 넣어주었다. 6년 만이었다. 간호사가 옆에서 7년째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눈을 찡긋했다. 

그런데도 캐나다 사람들은 의료 체계를 만든 Tommy Douglas를 찬양한다. 이런저런 불평을 하다가도 병원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듯한 큰 수술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심지어 병간호까지 책임져주니 병원문을 나설 때는 미안한 느낌 마저 든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갑자기 아프지 말아야 한다. 천천히, 눈에 띄게 아파야 한다고 값진 결론을 맺었다. 

한국말을 실컷 했더니 덜떨어진 영어를 더듬거리다 뭉뚝한 막대기가 되어 버린 혀에 피가 돌았다. 쌩쌩하다. 혀로 책 종이도 벨 수 있게 샤프하다.  
어쩌면 모임에 나오는 우리 모두, 토론이 시작되고 10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이 구간, 삼키지 않아도 되는 이 시간을 위해 모이는 것일 거다. 책은 다만 거들 뿐. 

스피어민트 차를 우린다.
목이 칼칼할 때 최고다. 
상큼한 멘톨이 입안에 한가득, 단내 나는 긴 수다의 끝을 청량하게 마감해준다. 
집에 가려고 다시 마스크를 썼더니 늘 불쾌하던 입 냄새 대신 박하 향이 난다. 
어머 이거 코로나 시대의 필수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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