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열여덟 번째] 레모네이드 색깔 배틀

김원경 승인 2021.03.31 14:32 | 최종 수정 2021.03.31 14:39 의견 0

또 속았다. 
캐나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내 마음을 흔들어 놓고 늘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 

분명 산들산들 봄바람이었다. 이파리 개수를 세 가며 겨우내 애지중지하던 명자나무 화분을 퇴근하면서 가게 앞 테라스에 내놓았다. 봄볕에 열두 장 이파리가 기쁨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침에 나갔더니 아뿔싸 밤새 눈이 하얗게 쌓였다. 급히 안으로 들였지만, 명자 이파리 중 몇 개는 끝내 떨어지고 말았다. 
깻잎 모종을 설레게 심었다가 때아닌 폭설에 얼어 죽게 만든 게 몇 해쯤 이어지면 공부가 될 듯도 하건만 캐나다 봄바람에 미련하게 또 속았다. 

오늘 또 봄이다.
몬트리올에서 두 달 전에 이사 오셨다는 멋쟁이 할아버지가 시원한 차 한 잔을 청하신다. 대도시 콘크리트 정글을 벗어나 아늑한 몽튼으로 왔더니 찻집마저 딱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고 덕담을 하신다. 의욕이 샘솟았다. 

투명하고 날씬한 유리잔에 맑은 얼음을 채우고 레몬즙을 짜서 삼 분의 일 쯤 따른다. 탄산수를 그만큼 더하고 마지막에 히비스커스 차를 우려 얼음 위에 살살 뿌리면 얼음 사이로 붉은 꽃물이 흘러내려 건강하고 섹시하고 시원하고 기분 좋은 차가 만들어진다. 
히비스커스 레모네이드다. 

히비스커스는 요즘 내가 약으로 쓰는 차다.
차를 공부하다 보면 수없이 나열되는 어려운 성분에 몸에 좋다는 부위나 증상도 넘쳐나서 그야말로 만병통치 약급 칭송을 하니 차를 파는 나마저도 언젠가부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실제 효험이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딱 맞는 실험체가 있었다. 
고혈압, 고지혈증에 합병증인 통풍까지 껴안고 사는 남편. 살살 구슬려 매일 히비스커스를 한 포트씩 마시게 했다. 처음엔 날마다 입술이 빨갛게 되도록 뜨거운 차를 한 포트씩 마시기가 괴롭다고 도망 다니더니 때마다 공포로 찾아오던 통풍 발작이 멎으니 이젠 자신이 더 믿는 눈치다.
서너 달에 한 번씩 통풍이 오면 걷지도 못하고 극심한 통증에 일주일씩 누워야 했었다. 히비스커스를 마시기 시작한 후 일 년이 훨씬 지났으나 아직 한 번도 발작이 오지 않았다. 항염, 항산화, 이건 확실히 효험이 있다. 혈압도 많이 떨어졌다. 다만 버럭하는 횟수는 크게 줄지 않았다. 화를 다스리는 효과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늘 똑같은 메뉴가 지겹겠다 싶어 이런저런 방식으로 메뉴를 개발했다. 시원하게 마시는 히비스커스 레모네이드도 그중 하나인데 맛도 좋다 하니 몬트리올 할아버지께 내어 본 것이다. 

상큼한 레몬이 듬뿍 든 붉은 꽃잎 차, 히비스커스 레모네이드를 할아버지가 홀짝이시며 시원하다고 좋아하신다. 몇 칸 건너 테이블에 아까부터 할아버지가 주문하는 걸 힐끔 보시던 혼자 오신 할머니 손님이 차 빛깔이 참으로 곱다고 맞장구를 치시며 참견을 하신다. 할머니도 주문을 넣으시는데 좀 까다롭다. 또 어떤 색깔의 차가 있느냐고. 색깔 배틀을 할 참이신가. 

투명하고 날씬한 유리잔에 맑은 얼음을 채우고 레몬즙을 내 조금씩 따른다. 탄산수를 더하고 마지막에 나비 완두콩 꽃을 우려 얼음 위에 살살 뿌리면 얼음 사이로 파란 꽃물이 흘러내려 신비하고 시원하고 기분 좋은 차가 만들어진다. 
오로라 레모네이드다. 

Butterfly pea flower(나비 완두콩 꽃)는 버마,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에서 자라는 꽃이다. 예로부터 마음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이며 기억력을 좋게 하는 약초로 여겼다.
이 꽃을 우리면 선명한 파란색이 되는데 레몬을 함께 넣으면 레몬의 양에 따라 보라색이나 분홍색으로 바뀌는 신기한 색깔의 향연을 보여준다. 레몬즙을 조금씩 흘려 넣으며 색깔이 변하는 걸 보고 있으면 조로아스터의 추종자들이 불꽃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듯이 찻잔을 보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할머니가 오로라 레모네이드 푸른 찻잔을 들고 할아버지를 향해 미소짓는다. 묘한 자긍심이 깃든 하얀 손목의 우아한 튕김.
할머니의 파란 찻잔을 향해 할아버지의 히비스커스 붉은 찻잔도 따라 들어 올려진다. 빨강 파랑 찻잔 사이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내가 일부러 판을 짠 것이 아니다. 꽃차들이 스스로 한 일이므로. 두 분의 뒷이야기를 더는 모른다. 

오늘은 왠지, 명자나무 화분을 테라스에 내놓아도  좋을듯하다.

저작권자 ⓒ OBSW,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