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열여섯 번째] Stay close

김원경 승인 2021.03.17 09:28 | 최종 수정 2021.03.17 09:36 의견 0

여자 손님이 씩씩하게 찻집 문을 열더니 문을 활짝 연 채로 계속 서 있다. 

칼바람이 쏟아져 들어와 평온하던 찻집 공기를 휘젓는다. 몽튼은 북위 46도에 위치해 겨울 날씨가 내몽골이나 사할린 급이다. 한참 동안 문이 열려있으니 나도 모르게 히터 온도계로 눈이 갔다. 살짝 심술이 올라왔다. 

여자는 오십쯤 되었을까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연신 쓸어올리면서도 문을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Mom! 

할머니가 들어오신다. 슬로우 모션으로 오신다. 
분홍 머리띠를 예쁘게 두르신 할머니 머리가 위아래  흔들림 없는 직선 궤적을 그리며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왔다. 잠시 후 마침내 문지방 넘기를 성공리에 마치자 두 모녀가 손뼉을 치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나도 엉겁결에 손뼉을 쳤다. 

사할린 같던 찻집 분위기가 금세 밝아졌다. 

엄마와 딸은 쉴 새 없이 수다를 떤다. 할머니가 말을 할 때는 슬로우 모션이 아니고 2배속이어서 놀랐다. 할머니의 분홍 머리띠가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할머니 눈도 반짝인다. 진열장의 앤틱 찻잔을 하나하나 딸에게 설명하면 딸이 감탄하듯 추임새를 넣었다. 마치 젊은 시절 사진첩을 펼쳐 보이며 옛 연인과의 로맨스를 말해주는 것처럼 할머니의 눈빛이 아련했다. 잠시 난방비 걱정을 했던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딸을 보러 세계 여기저기 안 가본 곳이 없다고 자랑하신다. 딸이 이번에는 브라질로 가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딸을 보러 가기에는 걸음이 느려졌다고, 대신 이렇게 우리 찻집으로 짧은 시간 여행을 오셨다고 하신다. 

다정한 모녀의 마실을 축하하고 싶어서 다르질링 차를 권했다. 
다르질링이 홍차의 샴페인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인도의 자랑거리로 중국의 기문, 스리랑카의 우바와 함께 세계 3대 홍차 중 하나로 꼽힌다. 홍차지만 무겁지 않고 경쾌해 과연 홍차로도 축배를 들만하다. 

가게 일을 도우러 나온 딸 소희까지 합세해 넷이서 축배를 들었다. 

밴쿠버에서 미술대학을 다니다 코로나 때문에 잠깐  집에 와있는 딸아이도 새 학기에는 도시로 나가게 될 것이다. 같은 캐나다라지만 몽튼에서 비행기로 8시간을 가는 먼 곳이다. 할머니도 나도 그리움이 걱정이다. 

"Stay close" 
할머니가 소희와 나를 보시고 눈을 찡긋한다. 
더 가깝게, 아끼며 지내라는 뜻이지만 웬일인지 단어 자체로 들렸다.
가까운 데 살아. 가슴이 아렸다. 엄마 생각이 났다. 

딸이 너무 멀리 이사를 가버린 엄마. 가끔 함께 쇼핑하고 맛집에 가고 싸우는 걸 못하는 엄마. 엄마가 제일 좋아하던 언니, 큰이모가 돌아가셨다고 전화하시곤 애써 호상이었다고 웃으셨다.
할머니 잔에 뜨거운 다르질링을 따라드리다 말고 화장실에 숨었다.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펀디만 숲에 나만의 고사리밭이 있다. 이웃 한국인들이 졸라도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 엄마를 위한 비밀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사람 하나 오지 않는 오지, 펀디만 숲의 고사리는 아기 손가락만큼 통통하고 부드러워서 맛이 좋다. 깨끗한 대서양 바람에 산들거리며 키 크게 자란 고사리 밑동을 꺾으면 똑하고 경쾌한 소리를 낸다. 푸른 이끼들이 끝없이 펼쳐있고 사이사이 고사리가 셀 수 없이 피어있다. 깨끗하고 순수한 캐나다의 자연을 흠뻑 머금은 건강한 고사리. 캐나다 사는 딸이 엄마에게 보낼 게 이것뿐이라 해 저무는지도 모르고 꺾었다. 남편은 캐나다 고사리 씨를 다 말릴 셈이냐고 투덜거렸다. 

내가 일부러 ‘모녀 특집’을 기획한 것도 아닌데 요즘 부쩍 모녀가 차를 마시러 많이 찾아온다. 나의 '가깝지 않은 죄'를 벌주기 위해서다. 
할머니가 가시고 오후에는 한 엄마가 딸과 딸 친구들 셋을 데리고 에프터눈 티 파티에 오셨다.
작은 숙녀들이 다소곳이 앉아 엄마의 설명을 들으며 레이디 수업을 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공손히 찻잔을 받치고 100년 묵은 찻잔에 차를 홀짝이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전통도 사랑도 이렇게 이어진다. 

딸아이 소희가 꼬마 손님에게 낼 스콘이 익었는지 허리 숙여 오븐을 살피고 있다. 이렇게 엄마를 돕다가 조만간 밴쿠버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또 휑해져서 며칠 앓을 것이다.
소희가 스콘을 꺼내며 나한테 적당한지 묻는다. 세상 모르는 천진한 눈이다.
아마 내가 대답도 하지 않고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봤나 보다. 
소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 괜찮아 묻는다. 

"미안, 잠깐 딴생각하느라고"
나는 또 화장실에 숨는다.

저작권자 ⓒ OBSW,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