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의 패러디 이용법: '맨하탄 살인사건'

장서희 승인 2021.02.11 10:16 | 최종 수정 2021.02.11 10:24 의견 0

우리 앨런은 패러디를 참 잘 쓰는 감독이다. 패러디란 사전적 의미로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을 말한다. 그는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1975년작 '사랑과 죽음'에서 러시아가 배출한 걸작 '전함 포템킨'의 명장면을 패러디한 바 있다. 우디 앨런이 연기한 주인공 보리스가 백작 부인과 함께 밤을 보내는 씬에서 '전함 포템킨'의 그 유명한 일어서는 사자상 몽타주를 그대로 가져와 상황의 흐름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영화 '맨하탄 살인사건'은 뉴욕에 사는 여피 부부 캐롤과 래리가 그들의 옆집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죽였다고 의심하게 되면서 진실을 추격해가는 유쾌한 코미디 영화이다. 1990년대 맨하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서스펜스의 거장인 히치콕의 영화 '이창'과 '현기증', 그리고 오손 웰스의 필름누아르 '상하이에서 온 여인'이 절묘하게 패러디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설정은 1954년에 만들어진 '이창'의 설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창'에서 주인공 제프리는 다리를 다쳐 집에서 요양생활을 하면서 지루함을 못 이겨 이웃들의 집을 엿보는 것을 즐긴다. 그러던 중 어느 부부가 사는 건너편 집에서 수상한 낌새를 느낀 제프리는 그 집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맨하탄 살인사건'의 주인공 캐롤 역시 이웃이 아내를 살인했다고 의심하게 되는데, 다만 그 의심은 중년 여피들의 평탄한 부부생활이 주는 권태로움에서 시작됐다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캐롤이 단서를 캐기 위해 옆집에 몰래 숨어드는 장면 역시 이창에서 제프리의 연인 리사가 건너편 집에 잠입하던 것과 동일한 설정이라 할 것이다.

캐롤은 옆집 아내 릴리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석연찮게 여기던 중에 우연히 창밖으로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 릴리안의 모습을 발견하고서 충격에 빠진다. 이는 또다른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이다. '현기증'의 주인공 퍼거슨은 자신이 미행하다 사랑하게 된 매들린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죽은 여인은 그가 사랑했던 매들린이 아니라 친구의 아내였다. 이에 퍼거슨은 살아있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맨하탄 살인사건’에서 죽은 줄 알았던 옆집 여인 릴리안 역시 버젓이 살아있었으며, 실제 죽은 여인은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디 앨런은 이러한 패러디의 의미를 보다 돋보이게 하기 위해 릴리안이 타고 있는 버스에 걸린 'vertigo(‘현기증’의 원제)'라는 광고판을 대문짝만하게 보여주는 위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그 뒤에 이어진 급격한 줌인은 히치콕이 '현기증'에서 줌아웃 트랙인을 통해 선사한 시각적 충격에 대한 우디 앨런 식의 유쾌한 화답으로 보인다.

폴의 범죄를 밝히려고 애를 쓰던 캐롤이 폴에게 납치되자, 래리는 캐롤을 구하기 위해 폴이 운영하는 극장에 찾아간다. 극장에서는 한창 '상하이에서 온 여인'이 상영되고 있었다. '맨하탄 살인사건'은 극 중에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장면을 직접 삽입하고, 그 사운드를 교차 사용해 가면서 노골적인 패러디를 전시한다. 그 유명한 거울방 장면의 패러디가 클라이맥스에 달한 것은 폴의 동료인 미시즈 달튼이 등장해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다음 명대사를 따라하는 순간이다. '너를 죽이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과 같다.' 참고로 이 거울방 씬은 오우삼 감독의 1997년작 '페이스 오프'에서도 패러디되어 크게 유명세를 탄 적이 있다. 

1950년대의 '이창'이 개인의 관음증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갔다면 '맨하탄 살인사건'은 그 이면에다 이웃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대도시 중산층의 폐쇄성을 더해 동시대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맨하탄 살인사건'은 누구나 알아보기 쉬운 명작들을 패러디해서 극 중의 재미를 높이는 한편 작품의 의미에 깊이를 더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지난 작품들을 반추하게 한다.  

2011년 신설된 저작권법 제35조의5는 저작물의 공정이용에 대한 일반조항으로 법 제23조부터 제35조까지의 경우 외에도 저작물의 통상적인 이용 방법과 충돌하지 아니하고 저작자의 정당한 이익을 부당하게 해치지 아니하는 경우에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통상 패러디가 이러한 저작물의 공정이용에 해당되는 용례이다. 

'맨하탄 살인사건'에서 '이창'이나 '현기증'을 패러디한 것 또한 저작물의 공정이용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우리 법원은 패러디는 원저작물의 비평적 내용을 부가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과거 서태지가 제기한 소송에서 '컴배콤' 저작자의 '컴백홈' 패러디 항변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컴배콤'이 원곡의 독특한 음악적 특징을 흉내 내어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는 정도에 그칠 뿐 원곡에 대한 비평은 찾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서울지방법원 2001카합1837 결정 참조). 패러디란 결국 원저작물을 이용하여 그 저작물의 비평 또는 풍자를 이끌어내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어야 함을 이해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진 출처=영화 <Manhattan Murder Mystery(1993)>, 감독 Woody Allen 제공 TriStar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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