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열두 번 째] 런던에 런던포기(London Foggy)는 없었다

김원경 승인 2021.02.10 15:58 | 최종 수정 2021.02.10 16:38 의견 0

밀크티는 없나요? 

찻집을 하면서 가장 자신 없는 메뉴가 밀크티인데 하필 그걸 꼭 집어서 주문을 받으면 긴장된다. 

찻집을 막 시작했을 때 어떤 노부인께서 밀크티를 드시고 얼굴을 찡그린 이후 생긴 공포다. 

아마 수 세기 밀크티를 마셔온 이들에게는 밀크티의 아주 작은 차이도 다 알아채는 미각이 특별하게 발달한 것일까? 

예를 들어 이 사람들은 찻잔에 우유를 먼저 넣느냐 홍차를 먼저 넣느냐를 가지고 100년이 넘게 편을 갈라 싸우고 있다.  우유 먼저파 MIF(Milk in First) vs 홍차 먼저파 TIF(Tea in First) 논쟁이 그것이다. 

특히 논쟁 초창기에 상류층이 '홍차 먼저파'를 옹호하고 노동자 계층이 '우유 먼저파'를 지지하면서 한국의 탕수육에 대한 '부먹 찍먹' 논쟁과는 다른 계급 논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홍차 먼저파 TIF의 주장.
홍차의 색과 향기, 맛을 순서대로 감상한 후 우유를 붓는 것이 차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홍차에 먼저 실버스푼으로 설탕을 넣어 잘 저은 후 우유를 나중에 부어야 차와 우유의 비율을 조절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조지 오웰이 대표적인 TIF파다. 그가 1946년에 발표한  에세이  ‘A nice cup of tea’에서 완벽한 차 한 잔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짚은 것이 바로 ‘차를 찻잔에 먼저 붓고'다. 

반면 우유 먼저파, MIF는 우유를 먼저 찻잔에 넣고 홍차를 부어야 우유와 홍차가 더 잘 섞이므로 한결 더 풍미가 좋은 밀크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우유로 예열하여 섬세한 찻잔을 보호할 수도 있고 따로 비싼 은수저를 쓸 필요도 없으니 이게 옳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밀크티 만드는 방법을 놓고 가족들이 갈려 싸우고, 우정이 깨지며, 서로를 신성모독이며 이단이라고 조롱하자 이 난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2003년 영국의 왕립 화학 협회가 나서기에 이르렀다. 

"우유를 먼저 넣어야 합니다."( MIF의 승리) 

왕립 화학 협회가 중대한 발표를 하자 영국이 환호와 비난으로 동시에 들끓었다. 협회는 근거로 차를 넣은 다음에 우유를 부으면 우유 단백질이 열 때문에 분열되어 끈적이게 된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이 발표는 오히려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인의 TIF파는 79%로 오히려 늘었다고 한다. 영국 왕실도 여전히 차를 먼저 따르고 있다. MIF파는 20%로 줄었지만, TIF파로 개종할 생각이 없는 골수파만 남아 힘겨운 밀크티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런 판국이니 내가 영국 이민자 출신이 세운 몽튼 이라는 도시에서 소신껏 밀크티를 내기란 위험한 일이다. 아마 첫날 오신 노부인의 심사를 건드린 것도 꼭 내 밀크티의 맛 때문에 만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아마 테이블 너머로 내가 차를 먼저 따르는지 우유를 먼저 따르는지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치열한 밀크티 전쟁에서 나 같은 이민자가 살아날 방법은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제3지대 밀크티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런던 리얼리 포기( London Really foggy)다.
이 밀크티는 말차와 같이 부드러운 홍차 가루를 개어 거품 우유를 얹어 먹는 새로운 방식으로 만든다.
개성이 아주 강한 차로 우리 찻집 베스트셀러 중 하나다. 좋아하는 사람은 이것만 찾는다. 다만 안 맞는 사람은 한입 먹고 밷어내는 경우도 봤다. 
하여간 MIF도 TIF도 시비 걸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새로 만들었으니 노부인 몰래 우유를 따르며 마음 졸일 일도 더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 이번 손님이 런던 포기에 감탄하며 묻는다.
"정말 다르네요. 뭔가 한 방 먹은 느낌이에요. 그런데 왜 런던에서는 이 차를 보지 못했을까요?" 

당연하다.
이름에 런던이 들어 있지만 실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처음 시작된 차니까.
아무래도 밴쿠버 어느 찻집 주인도 MIF,  TIF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다가 살길 찾아 이 차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안개 낀 런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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