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다섯번 째] Jassy의 선택

김원경 승인 2020.12.23 14:18 | 최종 수정 2020.12.23 14:25 의견 0

겨울비가 온다.

캐나다의 첫인상은 어마어마한 눈이었다.
집집마다 한쪽으로 눈을 쌓아 놓는데 어른 키보다 높다.
남편은 삽질을 하고 어린 딸과 아들은 지붕에서 눈더미로 뛰어내리며 논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주전자에 타서 김을 호호 불어 컵에 따라주며 백설공주처럼 온통 새하얀 눈 세상을 만끽한다. 

동네 사람들이 눈 치우는 기계(Snow blower)를 요란하게 돌리다 말고 서서 묘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 가족을 쳐다본다. 후훗 낭만을 모르는 사람들, 시끄러운 엔진 소리로 운치를 망가뜨리고 있잖아. 가격도 3백만 원씩이나 한다던데. 

남편도 눈 치우는 게 즐거운지 콧노래를 부른다. 오랜만에 아빠 노릇을 하는 게 뿌듯한 듯 열심히 삽질을 한다. 남편 코에서 한 마리 말처럼 허연 김이 연신 뿜어져 나왔다. 

이듬해 눈 치우는 기계부터 샀다. 남편이 허리를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기예보에 눈 소식이 있는 날이면 남편이 비루먹은 말 울음 소리를 냈다.

뭔 일인지 올해는 12월이 다 가도록 눈이 좀체 오지 않는다. 하늘이 코로나에 걸렸나 대신 비가 온다. 

조그만 키에 야무진 입술을 가진 남자분이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는 폼이 처음 오는 손님이다. 

Jassy’s choice? 그걸로 할게요

이 메뉴는 좀 특이한 메뉴인데 알고 시키시나?
이름 그대로 내가 선택해서 내 마음대로 주는 메뉴라고 설명하자 잠시 눈빛이 흔들리다가 그러라고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을 상대방도 무조건 좋아해 줄 리 없으리라는 것 나도 안다. 하지만 그만큼 나 자신의 경험과 온몸의 감각을 믿고 자신 있는 것만 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혼자 온 손님.
견고한 말투, 주관이 뚜렷한 타입.
게다가 겨울비가 내린다. 
판단은 직관적으로, 빠르게.
랍상소총이다.

뒷마당 모닥불에서 하얀 연기가 낮게 깔리고 나무 타는 냄새가 탁탁거리는 파편과 함께 튀어 오르는 풍경이 딱 떠오르는 차. 차에 깊게 베어 있는 훈연향 때문일 것이다. 이 특유의 향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지만 이 향 때문에 유럽인들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유럽에 처음 들어온 홍차가 정산소종인데 중국의 푸젠성 무이산에서 기른 찻잎에 소나무를 태운 연기를 쐬어 만드는 차이다. 순식간에 그 맛에 홀딱 빠진 유럽인들의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게 되고 가격도 하늘 높이 올라가자 무이산 너머 인근에서도 널리 연기를 태워 훈연 차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홍차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랍상소총(lapsang souchong)이다.

홍차, TWG의 임페리얼 랍상소총을 우린다. 오리지널 푸젠성 무이산의 찻잎이니 믿을 만 하다. 차 통을 열자 스모키 훈연 향이 모닥불 연기처럼 주변에 퍼진다. 물 온도 95도. 보통 때보다 약간 적게 2.5g을 우린다. 훈연 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묵직한 바디, 입이 아릴 만큼 강한 인상을 줄 것이다. 
비가 진눈깨비로 바뀌고 있다.

좋네요. Black tea 종류인가요?
차를 내니 손님이 묻는다. 
우린 홍차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Black tea 맞아요.

어릴 때 듣던 홍차의 시작은 유럽 상인들이 중국에서 녹차를 싣고 가다가 그만 검게 상해버렸는데 이 못쓰게 된 차를 '블랙티"라고 이름을 지어 팔았더니 사람들이 좋아하여 홍차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자료들을 읽어보니 엉터리 기원설이었다. 홍차는 원래 서양에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중국 사람들이 살청, 위조, 유념, 발효, 건조의 섬세하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들고 즐겨 붉게 우려 마시던 차였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색깔도 다른 법. 차를 마시는 자는 홍차라 부르니 그의 손에 들린 한 잔의 홍차 빛이 붉은 연유요, 장사하는 자는 Black Tea라 부르니 그의 손에 들린 상품 자루의 홍차 잎이 검게 보이는 까닭이다. 유럽 상인들이 홍차의 이름을 Black Tea다라고 지은 까닭이다.

손님이 차를 맛보다 급히 휴대전화를 들춰본다.

"맞아. 여기가 내가 가보고 싶은 곳 리스트에 표시했던 곳 중의 하나였어요. 우연히 들렀는데 이곳인 줄은 몰랐네요" 신기해하며 말했다.

"호호. 그럼 두 번 오신 셈이네요. SNS로 한 번, 우연히 한번"

그렇다. 선택은 미리 정해 넣고 밀어붙이기도 하고 우연히 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어떠한가? 
스물 무렵 디자인을 공부할 때 부티크와 카페를 결합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50이 넘어 먼 이곳 캐나다에서 Jassy boutique & tearoom을 열었으니 나의 선택은 예정된 것이었을까 먹고사니즘과 우연히 만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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