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티베트 46편] 호탄서 뤄창(若羌)까지

백민섭 승인 2022.01.03 13:32 | 최종 수정 2022.01.03 13:41 의견 0

호탄에서 약 290Km 정도 떨어진 곳 민펑으로 돌아가는 길.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단을 따라 옛날 비단길의 하나였던 서역남로의 동쪽으로 가는 길은, 카슈가르(喀什) ⇨ 예청(葉城) ⇨ 호탄(和田) ⇨ 민펑(民豊) ⇨ 치에모(且末)⇨ 뤄창(若羌) ⇨ 양꽌(陽關)을 거쳐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으로 이어지는 길로 한나라 때부터 이용했다.

당대(唐代)에 접어들어 둔황에서 옥문관(玉門關)을 거쳐 쿠얼러 ⇨ 쿠처 ⇨ 카슈가르로 가는 서역북로(西域北路, 또는 천산남로)를 주로 이용하자, 서역남로의 번성했던 오아시스 도시와 왕국들은 쇠퇴하게 된다.

잊혀졌던 서역남로가 다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석유와 가스 때문이다.

타클라마칸사막에 유전이 개발되면서 1998년 10월 중국정부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사막공로(沙漠公路)를 개설했다. 실크로드 천산북로의 룬타이(輪台)에서 천산남로 민펑(民豊)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을 통해 석유와 가스를 동부로 이송하는 것이 가장 가깝고 용이하기 때문이다.

차는 마치 바다를 항해하듯 망망한 평원을 달린다. 이따금 오아시스마을들이 섬처럼 나타났다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두 시간을 달려 사막 한가운데 이르니 온 사방이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다. 모래 바람에 포장도로가 덮일 것을 염려하여 마른 갈대로 사방공사(砂防工事)를 해둔 것이 이채롭다. 바람에 날리던 모래가 그 방사림에 걸리게 되면 자연적으로 작은 둔덕을 이루고 그 둔덕이 점점 높아져 저절로 구릉(丘陵)을 이루며 커지고 있다.

계속 따라오던 쿤룬산맥도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실려 온 모래들이 쭉 뻗은 도로 위에서 파도처럼 춤을 춘다.

이제 완벽한 사막이다. 온 사방이 모래바다다. 사구들이 높은 파도처럼 스쳐 지나간다. 수많은 공룡 떼들이 지나가는 듯한 사구를 만나기도 한다. 이런 사막을 걸어서 지났을 구법승과 대상들의 한숨과 외로움이 온 몸으로 젖어 든다.

그 옛날 산맥과 사막 사이를 만년설이 녹아 유입되면서 오아시스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정착하자 자연스레 길이 생겼다. 그 길에 사람과 물류가 오가는 실크로드가 탄생했다.

기후가 변하고 물이 마르자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서역남로는 실크로드에서 한동안 쇠락했다.

20세기에 이르러 타클라마칸(塔克拉瑪干)에서 발견된 유전 때문에 사막의 남북을 연결하는 사막공로가 생기면서 315번 국도 즉, 서역남로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유전 덕분에 잘 닦인 길을 달려 돌아온 민펑(民豊).

218번 사막공로와 315번 국도와 합쳐지는 곳 끝에 위치한 오아시스마을이다.

시내 외곽에 이르자 그림 같은 목초지가 펼쳐진다. 사막을 몇 시간을 달려온 이방인에게는 뜻밖의 광경이다. 목초지의 넓이와 색깔만큼 풍요로운 마을임을 직감하게 된다. ‘백성들이 풍요롭다’는 뜻을 가진 민펑(民豊)은 21세기에 새로운 오아시스로 거듭나고 있었다.

걱정꺼리도 있다. 타클라마칸사막에서 몰려 온 모래 때문에 마을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수자원을 확보하는 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민펑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중국 중앙 정부도 이곳의 사막화를 방지하는 사업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치에모(且末)까지 가는 일정으로 가장 위구르답다는 시장만 보기로 한다. 민펑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재래시장이 있다. 시장은 작은 도시답지 않게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 시골의 5일장 분위기다.

가축시장으로 가는 위구르인. 양을 매달고 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가축시장으로 가는 위구르인. 양을 매달고 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시장의 초입은 여느 신장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먹을거리가 손님들을 맞이한다. 이 지역의 특산물이자 명물인 하미과(哈密瓜-멜론)와 티옌과(甛瓜-참외)가 탐스럽고, 건포도, 호두 등 견과류와 석류 등 형형색색의 다양한 먹을거리가 즐비하다.

어느 샌가 양고기를 굽는 냄새가 코끝에서 진동한다. 숯불 위에 지글지글 굽고 있는 양꼬치는 신장의 대표적인 먹을거리. 숯불에 짭조름한 향신료를 살살 뿌리면서 구워낸 꼬치와 빠이주(白酒) 한 잔은 참기 어려운 유혹이다.

이채로운 것은 시장 노천에서 운영되는 길거리 정육점이다. 주로 소와 양고기인데

소머리와 양머리가 간판처럼 전시되고 그 뒤로 해체된 다양한 부위가 진열되어 있다. 아마도 갓잡은 신선한 고기라는 표시 같다. 우리는 혹시나 하면서도 슬그머니 셔터를 누른다. 그 엽기적인(?) 장면을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장의 이모저모는 정말 사람 사는 풍경이라서 떠나기가 쉽지 않다.

민펑 재래시장의 오후
민펑 재래시장의 오후

민펑에서 동쪽으로 약 308km 떨어져 있는 치에모(且末, 또는 Cherchen) 가는 길.

제2사막공로를 이용할 수 있지만 315번 국도로 간다.

호탄 갈 때 한번 지났던 사막이지만 그때 머릿속에 넣어 두었던 기억은 사라지고 낯설게 다가온다. 민펑에서 치에모 가는 길은 모래산의 연속이요 어디를 보아도 하늘과 맞닿은 망망사해(茫茫沙海)다. 거대한 블랙홀에 떨어진 느낌이다.

도로 양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사구들이 춤을 추면서 따라 온다. 광활한 사막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아스팔트도로는 너무 명료하여 한줄기 빛처럼 앞길을 인도하고 있다.

4시간여를 달려 치에모에 도착했다.

예전 같으면 하루는 족히 걸렸을 거리지만 315번 국도가 정비된 이후로는 이동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2002년에는 타쭝에서 남쪽으로 길을 하나 더 내어 치에모까지 연장되었다.

쿤룬산맥에서 가장 높은 무쯔다꺼봉(木孜塔格峰, 7723m)을 남쪽에 두고 있는 치에모는,

치에모(且末)국과 시아오완(小宛)국의 도시였으며 옛 체르첸의 왕국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현급 도시가 됐다. 위구르족이 75% 이상 차지하는 위구르인의 마을이다.

치에모는 남쪽에 쿤룬산맥에서 발원한 8개의 강이 현 가운데를 지나고 있어 수량이 풍부하다.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이 깊숙이 들어 온 곳이다. 지금은 아파트와 빌딩 등 현대화 사업으로 예전의 치에모는 찾아보기 어렵다. 10년 이상 미래를 보고 추진된 현대화 사업이라 인구 규모에 비해 모든 것이 크고 널찍하나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깔끔하게 정비된 시내에는 옥공예품을 파는 가게들이 골목마다 자리를 잡고 있다.

치에모 역시 호탄과 마찬가지로 옥의 도시로 유명한 곳. 아얼진산(阿爾金-쿤룬(崑崙)산맥의 지맥)에서 쿤룬산맥까지 약 800km 구간에서 옥이 생산되는데, 치에모현도 그 범주에 있다.

인구는 약 6만 명 정도다. 2002년 타클라마칸사막을 남북으로 관통한 사막공로(沙漠公路)가 생긴 이후 2016년 12월 19일 치에모공항(且末机场) 신설되면서 여행자가 늘고 있다.

예전에는 근처에 위치한 로프(Nop)사막에 핵 실험장이 있던 군사시설이라 출입통제가 됐던 곳, 외국인은 허가를 받아야 갈 수 있었던 곳이었다.

치에모 고성 터-
치에모 고성 터-

치에모의 남서쪽에 있는 치에모 고성(且末古城)으로 향한다. 치에모 고성은 넓이가 1800㎢에 이르며 출토 유물을 분석한 결과 춘추시대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한참을 헤매고서야 유지(遺趾)를 찾았다. 고성이라고 해서 높다란 성벽과 망루 등을 기대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타클라마칸사막 속에 묻혀 이미 폐허가 된 유적을 찾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번성했던 오아시스국가 치에모왕국의 고성은 3000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대홍수로 모든 것을 잃었다. 수천 년 동안 사막의 모래바람에 시달린 고대도시는 찾을 수 없었다. 수많은 불가사의와 풀리지 않는 역사적 신비를 간직했던 도시는 1957년 중국 과학 아카데미의 사막 연구원 (Institute of Desert Research)이 발견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것은 그저 왕국의 옛터일 뿐이다.

도시는 모래 밑에 숨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 사막이었다.

그 옛날 대홍수의 상처를 짐작할만한 야단(Yadan-가파른 산이나 험준한 계곡을 이르는 말)지형이 건드리면 쓰러질 듯 서있다. 아마도 고대도시의 흙 성벽은 아니었을까.

인근의 또 다른 유적지로 향하는 발걸음이 진한 아쉬움으로 무겁기만 하다.

치에모를 왔다면 치에모고성 인근에 있는 짜후라커장원(扎乎拉克庄园)과 자군루커묘(扎滚鲁克古墓群)를 놓쳐서는 안된다.

시내 서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짜후라커장원(扎乎拉克庄园).

1911년에 건축된 것으로 총 면적 780㎡다. 당시 이 지역 최대 지주의 집이었다. 저택은 정사각형 모양의 건물로, 벽돌 벽과 나무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고, 11개의 방과 2개의 복도가 있는 고대 위구르족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황토벽에 단층의 단조로운 형태지만 카슈가르(Kashgar)에서 온 장인들이 위구르 전통방식으로 지은 집이다. 절묘하고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고 자랑하는데 이방인의 눈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흙에 달걀과 석고, 설탕을 혼합하여 바르고, 목재는 1년 동안 물에 담근 후 1년 동안 말려서 사용했다는 건축술에는 고개가 주억거렸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유아독존의 자태로 100년을 버틴 힘이었다.

1998년 지방 인민정부가 자치 지역의 핵심 문화재로 보호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애국주의교육기지(爱国主义教育基地)로 활용하고 있다. 위구르족의 특성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각종 생활도구와 유물이 남아있어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성 입구의 자군루커묘지(扎滚鲁克古墓)고분군은 약 2,600여 년 전 춘추시대(春秋时代)에 조성된 이 지역 귀족 가족의 무덤이다. 동서 약 750m, 남북 약 1,100m 크기로 1985년에 발굴되었다. 160여기의 고분을 발굴해서 출토된 미라와 도자기, 비단과 모피의복 등 부장품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자군루커 1호 묘지(札滾魯克1號墓地) 24호실은 주목할 만하다. 가족의 시신이 한꺼번에 합장되어 수천 년을 잠들어 있던 무덤으로, 14구의 시신이 한꺼번에 합장된 무덤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의 무덤이다.

무덤은 주로 수직 동굴형태의 직사각형이 대부분이다. 어른과 어린아이, 어떤 이는 앉아있는 모습, 어떤 이는 누워 있는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당시의 장례풍습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타지에서 죽은 후 이곳에 안장된 군인의 미라 등 다양한 사람들의 미라와 유물은 매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존상태가 놀라울 정도다. 특히 9호묘 발굴 당시 미라가 입고 있던 다양한 색채의 옷은, 당시의 방직, 염색과정 등이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색감도 요즘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다. 2,600년 전의 모습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다양한 군상들을 연결하여 당시를 상상해 볼 수도 있어 쏠쏠한 재미가 있다.

치에모를 떠나 뤄창으로 가는 길은 반듯하다.

러우란왕국과 미란왕국(米蘭) 탐사의 전초기지 뤄창(若羌) 가는 길.

치에모에서 뤄창 가는 길도 끝없는 사막으로 이어진다.

쿤룬산맥과 타클라마칸사막 사이를 보기 좋게 가른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사막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붉은 모래로 가득한 사막은 시시때때 자태를 바꾸면서 춤을 추고 있다. 그러는 사이 사막이 얼마나 무서운지 까맣게 잊고 있다. 서역남로가 쇠락한 후 가난을 면치 못하던 곳에 길이 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오아시스가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물이 풍부했던 예전과 달리 지속적인 사막화는 초지와 농지를 잠식하고 있어서 걱정거리가 된지 이미 오래다. 사막에서 발원한 황사현상 등 바람에 의한 자연재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사막과 인간의 투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뤄창 가는 315번 국도
뤄창 가는 315번 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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