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티베트 45편] 玉의 고장 호탄

백민섭 승인 2021.12.14 13:28 | 최종 수정 2021.12.14 13:39 의견 0

민펑 서쪽 연옥(軟玉)의 산지로 유명한 호탄(Hotan, 和田).

당나라 때는 유티엔(于闐縣-지금의 于田縣)이라 불렸다. 중국에 합병된 후 1959년에 허텐현(和田縣)으로 개칭되었지만 그 옛날 서역 36국의 하나였던 곳이다.

호탄은 당나라 때 서역으로 통하는 주요 교역로였다. 그래서 이곳의 안전은 당나라의 번영과 직결됐다. 당시 일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토번(지금의 티베트)과 치열하게 각축을 벌였었다.

8세기 초, 위기를 느낀 중앙정부에서 쿠처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있던 고선지(高仙芝) 장군을 유티엔의 진수사(鎭守使, 지방사령관)로 임명한다. 이에 고선지장군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하여 부임지로 갔다고 전해진다. 유티엔에서 처음으로 독립된 자기 부대를 지휘할 기회를 잡은 고선지 장군은 토번(吐蕃)과 맞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된다. 이 경험은 훗날 토번을 정벌하여 실크로드의 안정적 지배권을 확보하고 서역정벌의 위업까지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우연히 만난 고선지장군의 일화는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타클라마칸사막을 종단하여 호탄으로 가는 315번 국도
타클라마칸사막을 종단하여 호탄으로 가는 315번 국도

방향을 서쪽으로 잡고 예전의 서역남로였던 315번 국도를 따라 호탄으로 향한다.

쿤룬산맥을 넘어 예청(葉城)이나 카슈가르를 지나갈 때 남동진하면 바로 올 수도 있었던 마을. 사막공로를 지나볼 요량으로 315번 국도를 타고 타클라마칸사막 외곽을 돌아 쿠처와 제1사막공로를 지나다보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되짚어 오는 길이 되었다.

타클라마칸사막은 실크로드의 한 가운데 있다. 시안(西安-옛날의 长安)에서 시작하여 란저우를 지나 둔황(敦煌)으로 이어졌던 실크로드는 둔황에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옥문관(玉門關)을 지나 타클라마칸사막 북쪽 길을 따라 하미(哈密) ⇨ 투르판과 쿠처 ⇨ 카슈가르로 가는 서역북로(또는 천산남로)가 그 하나고, 양꽌(陽關)을 지나 로프노르(Lop Nor, 羅布泊) ⇨ 러우란 ⇨ 호탄을 지나는 서역남로(西域南路)가 다른 하나다.

고대로부터 서역남로는 실크로드의 동맥이었다. 지금은 타클라마칸사막을 일주하는 315번 국도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민펑에서 호탄까지 거리는 약 290km. 100km 쯤 달리다 보니 녹지로 덮인 유티엔현(于田县)이 나온다.

이 지역은 남부 신장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집들은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이 백양나무 숲속에 지었는데 사막의 열기와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당연한 선택이다. 멀리서도 보이는 하얀색 융단은 목화밭이다. 비닐하우스 단지와 밭들의 생김새로 봐서는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호탄 근처에서는 벼농사를 짓는 논도 볼 수 있다. 녹지대와 논밭이 많아 사막지대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2천여 년 전에도 인구가 2만여 명이나 살았던 도시였다는 것은 쿤룬산에서 내려오는 풍부한 수량으로 농사가 가능했다는 뜻일 것이다.

315번 국도는 유티엔현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주변에는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농경지를 비롯한 녹지대가 넓게 형성이 되어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큰 오아시스마을이 됐는지는 모를 일이다.

마지막 오아시스 처러현(策勒县)을 지나 217번 사막공로와 만나는 지점에 이른다.

위롱카시강 대교를 건너면 옥의 고장 호탄이다. 건기라 강은 말라 개천이 됐지만 다리규모만 보면 꽤나 큰 강이다.

카라카시강(喀拉喀什河)과 대교
카라카시강(喀拉喀什河)과 대교

호탄(和田)은 두 개의 강이 동서로 나뉘어 흐른다. 왼쪽으로는 카라카시강(黑玉河) 오른쪽으로는 위롱카시강(白玉河) 사이에 이루어진 오아시스도시다. 강 이름에서 짐작하듯 옥(玉)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카라카시강에서는 흑옥이, 위롱카시강에는 백옥이 채집된다. 이 옥들은 고대 유티엔국(于闐國)의 특산물로서 서쪽으로는 이란, 이라크 등 서남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동쪽으로는 중국에 진상품으로 보내졌다. 이처럼 파미르고원을 거쳐 서역과 인도로 가는 실크로드 상에서 동서무역이 이루어지는 중개시장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지금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소위 쿤룬옥(崑崙玉)의 주산지로 지난 2008년 북경 올림픽 때는 메달 뒷면을 제작하는데 쓰여 그 진가를 세계에 알렸다. 오늘도 엘도라도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듯 강바닥에는 수많은 사람과 포클레인이 엉켜 분주하게 강바닥을 헤집고 있다.

호탄은 실크로드 서역남로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 ‘호탄에는 없는 것이 없이 풍족하다’고 묘사했으나 요즘은 현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신장지역에서 가장 낙후된 도시로 전락했다.

카슈가르(喀什)보다 위구르의 전통이 더 보전되고 있는 유서 깊은 도시라는 평가로 위안을 삼아야 한다. 그래도 ‘옥의 고향', ‘비단의 고향’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던 전설적인 도시의 브랜드는 여전하다. 무엇보다 호탄은 옥(玉)으로 설명해야 한다.

17세기까지도 중국은 오로지 호탄에서 생산되는 옥밖에는 몰랐다.

고대의 호탄은 옥 생산 덕에 타리무분지내에서도 가장 크고 강력한 왕국이었다.

5~6월경 쿤룬산맥의 빙하가 녹아 위롱카시강과 카라카시강이 범람하면서 쿤룬산의 옥은 범람한 강을 따라 운반된다. 늦가을 건기가 시작되어 강바닥이 드러나면 옥을 채취하기 시작한다. 겨울 초입에 위롱카시강(白玉河)에서 옥을 줍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호탄은 비단과 카펫으로도 유명하다.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1500여 년 전 호탄으로 시집간 중국의 공주가 뽕나무씨와 누에고치를 머릿속에 숨겨와 호탄에 전파했다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그때부터 만들던 입던 위구르 여인들의 옷감이 호탄産 아틀라스(Atlas silk)실크였다. 위구르어로 ‘우아한’ 것을 의미하는 신장위구르 실크의 전통적인 패턴을 말하는데,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 다양한 색깔로 염색된 비단은 로마 귀족들에게 최고의 상품이었다. 그래서 실크로드의 교역품 중에 단연 으뜸은 비단이었다. 길을 떠난 비단은 사막과 파미르고원을 넘고, 도적떼를 피하고서야 겨우 로마의 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연히 비단은 금값과 같았고 그 비단의 생산지 호탄이 서역남도에서 가장 부강한 왕국으로 발돋움 한 것은 당연하다.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그 길을 실크로드(Silk Road)로 명명한 이유도 적절하다.

1500년 전 물레로 실을 뽑아 비단을 만들었던 유티엔국(于闐國)이 서역남로의 최대의 강국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었다.

그 전설 같은 얘기는 세월의 바람과 함께 스러졌다. 비단이 예전 같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호탄에서 빼 놓지 말고 봐야 할 것 중 하나는 수작업 실크 제작과정이다. 호탄 시내에서 약 10km남짓 떨어진 작은 마을 ‘지야샹(吉亚乡)’에 있는 ‘아틀라스 실크 핸드크라프트’라는 공장은 위구르 전통의 이슬람 실크 문화를 볼 수 있는 수공예 생산지다. 터널 같은 백양나무 가로수길이 인상적인 마을입구는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고, 위구르인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집들이 촘촘하다.

위구르인들은 집을 지을 때 대문을 중요시해서 크고 호화롭게 만든다고 하더니 아틀라스 실크 공장도 예외는 아니다. 갖가지 문양을 새긴 호화롭고 높은 이슬람식대문이다. 대문을 들어서자 비단을 만드는 공정별로 아담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전통적인 수작업을 하는 곳이라 찾아갔지만 생각보다 사람의 발길이 드물고, 3대째 60년을 꼿꼿하게 비단을 짜왔던 장인의 손길도 4대를 이을 손자와 함께 한가해 보인다.

호탄 실크를 만들기 위해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모습
호탄 실크를 만들기 위해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모습

예전 방식으로 가마솥에 고치를 삶아내고, 물레로 실을 뽑아 나무베틀에 걸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북이 바쁘게 오간다. 나무물레는 손때가 묻어 까맣게 반들거리고 베틀은 세월에 지쳐 삐거덕거리지만 여전히 호탄 최고의 비단을 토해낸다. 기계로 생산되는 비단 수천 필이 쏟아져 나올 동안 호탄의 비단은 한 필을 마감하지 못하지만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방법 그대로다. 비단을 짜는 노인의 굽은 손은 천연덕스럽고 주름진 얼굴엔 온화한 미소가 흐른다. 아직 철모르는 손자의 눈이 초롱초롱하다.

아쉽게도 쿤룬산맥 아래 서역남로의 최대의 오아시스도시 호탄 비단은 지금은 찬란하지 않았다.

옥(玉)의 엘도라도를 찾아서

옥(玉)을 찾아 강으로 가는 길에 호탄 시내 중심에 있는 단결광장((团结广场)을 지난다.

남과 북 끝단에 커다란 탑이 하나씩 있는데 북쪽의 탑인 대형 동상이 눈에 든다.

마오저뚱(毛泽东)이 그의 체구의 반밖에 안 되는 어떤 노인과 악수하는 모습이다. 노인은 유티엔에서 태어난 위구르인 꾸얼판 투루무(庫爾班吐魯木)라는 소작농이다. 1949년 중국이 신장을 합병한 후 실시한 토지무상분배의 수혜자였다. 잘 먹고 잘 살게 된 것이 중국의 은혜라고 생각한 그는 감사의 인사를 하러 떠난다. 당나귀를 타고 1년이 넘게 걸려서 베이징에 도착해 결국 마오저뚱(毛泽东)을 만나게 된다. 당시 중국은 그 사건을 신장합병의 정당성을 알리는 최고의 이벤트로 활용한다. 중국공산당 최고통치자와 위구르인 소작농의 만남은 어쩐지 애잔하지 않은가? 배고픔에서 벗어난 소박한 감사의 표시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정부에게 신장합병의 명분을 통째로 입에 넣어준 슬픈 사연이 되었다.

두 배 가까운 마오쩌둥의 크기와 위압적 분위기가 지금의 호탄을 상징하는 듯하다.

꾸얼판 투루무(庫爾班吐魯木)와 마오저뚱(毛泽东)
꾸얼판 투루무(庫爾班吐魯木)와 마오저뚱(毛泽东)

호탄시내에서 벗어나 위롱카시강 대교를 건너면서 보니 강폭이 엄청나게 넓다. 여름이면 쿤룬산맥의 빙하가 녹아서 위롱카시강(玉龍喀什河-白玉河)과 카라카시강(喀拉喀什河-黑玉河)의 수량이 넉넉하다고 했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옥(玉)은 달빛이 정화되어 만들어진 결정체라고 믿었다. 옥을 금보다 귀하게 여겨 황제의 인장도 옥으로 만들었다. 옥새(玉璽)란 말은 여기서 나온 것 같다. 옥은 그야말로 중국인의 보석이다. 호탄은 그런 중국인들의 고향이요 옥의 고향이다. 옥의 도시답게 가게나 건물 이름에 가장 흔한 글자가 옥(玉)이요, 거리마다 옥의 고장임을 알리는 간판들이 한명의 손님이라도 놓칠세라 빼곡하다.

화려하고 다양한 옥 상품의 값은 천차만별이라 선뜻 엄두가 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아주 친근하게 상품을 대하지만 외지인들은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산 넘고 물 건너 이 먼 곳까지 왔으니 특산품을 하나쯤 갖고 싶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

우리 탐사대도 횡재를 기대하며 강바닥으로 내려가 본다. 이미 수많은 이들의 노옥(撈玉)한 흔적이 지뢰밭 같고, 어떻게 생긴 돌이 옥인지 아는 사람도 없다. 자갈 반 모래 반인 강바닥에서 옥이 눈에 뛸 리 만무하다.

팬티만 입고 얕은 물속으로 들어가 발로 더듬는 사람, 큰 망치로 암석을 깨는 사람, 자갈밭을 헤집는 사람들이 옥 사냥에 빠져있는 동안, 탐사대는 고만고만한 옥을 들고 행상을 하는 동네사람들에게 포위된다. 재수가 좋으면 한 달 치 봉급이나 일 년 농사짓는 것보다 벌이가 낫다고 하니 해볼 만한 일이겠다.

매년 쿤룬산은 호탄의 주민들에게 옥덩어리를 선물로 주고 있지만 초행인 우리는 횡재는 커녕 봉변을 당할까 두려워 서둘러 강을 빠져나온다.

호탄(和田)을 떠나 다시 동쪽 사막을 향해 카라카시강(喀拉喀什河-黑玉河)을 건넌다. 옥의 횡재를 꿈꾸는 이들의 움직임이 신기루처럼 아른거린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풍경을 자꾸 눈에 집어넣고 머리에 새긴다. 다리 아래에 강물이 넘실대면 훨씬 좋았을 것 이란 아쉬움을 안고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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