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티베트 42편] 키질천불동(克孜尔千佛洞, Kizil)

백민섭 승인 2021.10.26 13:49 | 최종 수정 2021.10.26 13:59 의견 0

다음날 아침 쿠처 최대의 석굴사원인 키질천불동으로 향한다.

17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키질천불동(克孜尔千佛洞, Kizil-위구르어로 '붉다'라는 뜻)은 유네스코 세계인류문화 고대유산에 등재된 유서 깊은 곳이다.

쿠처에서 서북쪽으로 길을 나서 70km쯤 달려가자 빠이청(拜城)현 못 미친 곳에 천불동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무자티강(木扎提河)의 지류인 웨이깐하(渭干河)를 건너서 천불동 입구에 도착한다. 노랗게 물든 백양나무 터널이 시원스레 뻗어 있고 그 너머로 밍우다꺼산(明屋塔格山)에 조성된 석굴이 벌집같다.

키질천불동(克孜尔千佛洞)
키질천불동(克孜尔千佛洞)
키질천불동 입구 가로수길
키질천불동 입구 가로수길

늦가을이 매달린 화려한 백양나무길이 끝나는 곳,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입구에 서있는 검은 빛깔의 커다란 좌상이다. 천불동의 주인공 쿠마라지바(Kumarajiva, 鸠摩罗什, 343~413)스님의 청동좌상.

쿠마라지바(Kumarajiva) 좌상
쿠마라지바(Kumarajiva) 좌상

키질 천불동을 대표하는 38호 석굴 벽화에 묘사된 보살의 모습을 본 땄다는 동상은 마치 수년을 절제한 수도승의 모습처럼 처연하고 비감하다.

쿠처(龜玆國)왕실 출신으로 어린 시절 인도 간다라에 가서 불교를 연구하고 돌아와서 남북조시대 불교를 중국에 반석처럼 다져놓은 장본인이자 황금기를 개척한 불세출의 명승이었다.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여 당시 인도 불교를 중국에 전파하는데 큰 족적을 남겼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교 용어인 극락(極樂)이나 지옥(地獄),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불이공공불이색 색즉시공공즉시색(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말들이 모두 그가 산스크리트어의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만든 말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불교개념을 만든 스님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에서는 그를 남조(南朝)의 진체(真諦), 당의 현장과 더불어 중국 ‘삼장(三藏)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죽기 직전, 쿠마라지바는 "내가 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나를 화장해도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 했다는데, 화장한 뒤에도 과연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전설처럼 그의 불경번역은 그야말로 최고였던 모양이다.

불교의 부흥을 위해 평생 정진했던 스님의 검은색 동상은 그의 자부심만큼이나 엄중하고 의연하다.

키질석굴 전경
키질석굴 전경

키질천불동(克孜爾千佛洞)은 3세기부터 시작해 8세기까지 무려 500년 동안 조성됐다. 둔황의 막고굴(莫高窟)보다 1세기 이상 앞선 것으로 판명된 중국서북지역 최초의 석굴이다. 둔황석굴, 룽먼석굴, 윈깡석굴과 함께 4대 석굴의 하나인 키질석굴이 특별한 것은 각 석굴에 그려진 벽화 때문이다.

인도의 영향을 받아 간다라형식을 띠고 있으며, 청금석(Lapis lazuli)의 안료와 화풍이 독특하여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이미 확인된 석굴만 236개인데, 미발굴 된 것까지 합치면 300개가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중 벽화가 있는 석굴은 모두 75개다.

중앙아시아 미술의 정수로 알려진 동굴 내 벽화의 주제는 주로 불교와 관련된 전설과 부처의 생애에 관한 내용들로 그 수가 중국에서도 으뜸이다.

공개된 굴은 6~7개에 불과하고 입장하기 전에 카메라와 가방은 입구에 맡겨야 한다. 이곳 역시 석굴 내부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이 중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38개 석굴과 불상이 있는 석굴은 별도의 관람료를 내야 한다. 석굴은 대부분 가이드와 함께 보게 된다. 보존을 위해 출입문을 열쇠로 잠가 두기 때문에 가이드가 일일이 열어주면서 설명을 해 준다.

석굴을 몇 개를 보느냐는 오로지 가이드의 재량이 좌우하기 때문에, 가이드와 얘기만 잘 하면 많은 걸 볼 수 있다. 불행히도 탐사대가 만난 가이드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성의 없이 개방한 몇 개의 석굴을 보았으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개방된 석굴은 그 원형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이 심하거나 내용물이 시원치 않았다. 우상(偶像)을 싫어했던 이슬람교도들의 종파적인 파괴도 있었지만 중요한 석굴의 미술품들은 이이 오래전에 도굴 당했던 터였다.

투루판(吐鲁番)의 베제클리크천불동(柏孜克里克千佛洞), 고창국의 분묘인 아스타나(Astāna)고분군, 막고굴(莫高窟) 등 석굴의 벽화들은 20세기 초 일본 독일 프랑스 러시아 탐험대가 도굴한 유물들을 하이에나처럼 쓸어갔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키질석굴 역시 일본, 프랑스, 영국, 러시아, 독일 등의 도굴범들이 줄줄이 지나간 터라 원형을 파악하기조차 힘들 다.

외국인 도굴범들 중에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와 독일의 고고학자 르콕, 그륀베델은 특히 욕을 많이 먹는다. 석굴사원의 벽화를 칼과 톱으로 무자비하게 떼어내 일본과 유렵으로 밀반출했기 때문이다.

석굴들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약탈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석굴에는 잔인한 역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오타니 컬렉션

서역불교문화재의 대표적인 약탈자였던 일본의 승려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6~1948)가 수집한 막대한 양의 서역 유물 컬렉션을 말한다. 오타니 고즈이가 대승불교의 자취를 찾아간다는 명목아래 1902년부터 12년 동안 둔황, 투루판 등 중앙아시아에서 문화재들을 무자비하게 도굴, 약탈행위로 수집한 약 5,000여 점의 유물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 3분의 1 정도인 1500여 점이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돈이 필요했던 오타니는 당시 일본의 광산재벌인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에게 약탈 유물들을 양도했고, 그는 광산채굴권을 얻기 위해 당시 조선총독이자 친구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에 컬렉션을 기부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미처 일본으로 빼돌리지 못하고 한국에 남게 된 것이다. 이들 문화재는 약탈문화재로 알려져서 이를 둘러싼 반환논쟁이 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 3분의 1 정도인 1500여 점이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돈이 필요했던 오타니는 당시 일본의 광산재벌인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에게 약탈 유물들을 양도했고, 그는 광산채굴권을 얻기 위해 당시 조선총독이자 친구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에 컬렉션을 기부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미처 일본으로 빼돌리지 못하고 한국에 남게 된 것이다. 이들 문화재는 약탈문화재로 알려져서 이를 둘러싼 반환논쟁이 일고 있다.

키질석굴의 유물을 무참히 약탈한 이는 탐험대라는 미명하에 계획적인 도굴을 했던 독일의 알베르토 르콕(Albert Von Le Coq, 1860~1930)과 그륀베델(Albert Grünwedel, 1856-1935)이었다. 지금도 벽에 남아있는 칼자국은 모두 르콕과 그륀베델 일당이 남긴 것이다. 그들의 만행으로 애꿎은 관람객들이 피해를 본다. 관람은 꽤나 엄격하고 제한되었다. 석굴 안에 들어서니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된 석굴이 여럿 있어 가슴이 아프다.

키질석굴이 한국인에게 더 뜻 깊게 다가온 것은 르콕이 훼손한 작품들을 묘사하여 복원한 이가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인 인물을 만나려면 10호굴로 가야한다.

10호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장의 낡은 초상화와 혁명열사증명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검은색 양복과 붉은색 넥타이, 그리고 안경을 낀 모습은 세련되고 지적이다. 누구인가?

바로 키질석굴의 석굴벽화 복원 작업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족 동포 화가인 한락연(韓樂然)이다.

항일운동가이자 화가, 고고학자라는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 한락연(韓樂然, 1898~1947).

그의 본명은 한광우.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 출신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에서도 일했던 독립운동가였으나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된다. 중국공산당의 배려로 일찍이 상하이미술전문학교와 프랑스 루브르예술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였다.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조선족 예술가라는 개인사와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맞물리면서 항일운동과 공산당운동을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그의 투쟁 이력은 민중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그의 예술세계에서 이름 없는 소수민족들의 일상의 삶을 기록하게 된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7년 유럽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 우한(武漢)과 충칭, 시안 등지를 돌며 항일지하조직 활동에 헌신한다. 그러던 중 1940년 공산당 활동으로 국민당군에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 1944년 란저우에 비밀공작을 위해 왔다가 운명적으로 키질석굴 벽화의 복원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한락연의 초상화
한락연의 초상화

1946년부터 천불동 벽화를 모사를 시작으로 69호굴(경주 계림로 보검의 출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벽화가 있는 굴)까지 발굴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1947년6월, 비행기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제국주의 국가의 탐험대에 의해 훼손되고 약탈당한 석굴의 미술품들에 대한 모사, 연구, 기록, 발굴 뿐 아니라 석굴의 개수를 정리하는 일련번호를 만들어 석굴벽화 복원 작업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에서는 ‘중국의 피카소’로 추앙받지만 우리에게는 잊혔던 독립운동가 한낙연.

신장과 둔황 벽화를 조사, 연구를 책임진 중국미술사의 대가이기도 했다.

붓으로만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행동하는 투쟁가로 활약한 흔치 않은 사람이다.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그는 우리에게 낯설다. 보다 투쟁적으로 일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되었던 이력 때문에 남과 북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것이다.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에도 참여했고, 더 나아가 겉으로는 국민당이었지만 중국공산당의 비밀요원이기도 했다. 독립과 항일을 위해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새롭게 이해하게 돼 그나마 위안이었다.

키질가하 봉수대(克孜尔尕哈烽燧, Kizilgaha)가 있는 쿠처강
키질가하 봉수대(克孜尔尕哈烽燧, Kizilgaha)가 있는 쿠처강

쿠처로 돌아오는 길, 멀리 홀로 선 붉은 망루가 눈길을 잡는다. 사막 길로 접어들어 10여 킬로미터 쯤 들어가자 깊고 넓게 파인 쿠처강 바닥이 보인다. 여름철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만 물이 흐르는 건천이다. 그 강둑에 붉은 흙으로 만든 봉수대가 서있다.

가까이 보니 한나라 때 나무와 황토, 자갈 등으로 축조한 키질가하(克孜尔尕哈烽燧, Kizilgaha)라는 봉수대다. 역시나 생김새대로 고대 돌궐어로 '붉은 색의 초소(红色的哨卡)'를 의미다.

봉수대는 2000여 년 전 한나라가 서역을 통치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이 봉수대에서 불 또는 연기로 신호를 보내면 다음 봉수로 연이어져 도읍인 장안(长安)에까지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원래 높이는 20m를 넘었으나 지금은 13m 정도만 남아있다.

아직도 보존 상태는 양호하고 여전히 봉수대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하다.

키질가하봉수대(克孜尔尕哈烽燧)
키질가하봉수대(克孜尔尕哈烽燧)

메마른 강 협곡 위에 홀로 덩그러니 서있는 봉수대는 슬픈 전설이 하나있다.

쿠처왕국의 어느 왕에게 예쁜 공주가 한 명 있었는데 어느 날 점성술사가 백일 안에 죽을 운명임을 예언한다. 이에 왕은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키질가하봉수대 안에 숨겨 놓고 100일 동안 나오지 말도록 신신당부를 한다. 왕의 당부가 있은 지 99일이 지난 후, 이제 하루만 더 넘기면 된다고 생각한 왕은 공주가 무사히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백일이 되는 날, 왕이 보낸 마지막 식사를 맛있게 먹은 공주는 후식으로 사과를 베어 문 순간, 사과 속에 있던 전갈에게 물려 그만 목숨을 잃고 만다. 소식을 들은 왕이 봉수대로 왔을 때는 이미 공주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공주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던 왕이 슬픔에 못 이겨 봉수대 위에서 투신했다.

흐르던 강은 말라비틀어지고 거대한 협곡은 풀 한포기 찾기 힘든 사막이지만 실크로드 톈산 남로의 길목을 지키는 전초기지가 봉수대였다. 덕분에 땅의 주인이 바뀌는 정복전쟁이 수시로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어제는 불교도가 주인이고 내일은 이슬람교도가 주인이었던 땅을 무려 2000여 년이나 지켜 온 고독한 봉수대에 어울리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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