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티베트 41편] 실크로드의 신비를 간직한 쿠처(庫車)

백민섭 승인 2021.10.06 13:31 | 최종 수정 2021.10.06 13:35 의견 0

아름다운 카슈가르를 떠나 시 외곽으로 벗어나자 수리시설이 잘 된 넓은 경작지가 펼쳐진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사막을 옥토로 바꾸는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쿠처(庫車)로 가기 위해 314번 국도를 탄다. 314번 국도는 중국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길로 카라코람 하이웨이(Karakoram Highway KKH)로 불리기도 하고, 중빠요의꽁루(中巴友誼公路)라고도 한다.

톨게이트에서 투루판과 호탄을 잇는 투허고속도로(吐和高速, G3013)를 이용해도 된다.

탐사대는 보다 사실적인 신장을 체험하기 위해 314번 국도로 간다.

반대편 서쪽으로 가면 토루갓패스(Torugart Pass)를 넘어 키르키즈스탄, 사마르칸트로 이어지는 길로서 유럽으로 가는 길이다.

일대일로(一帶一路)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중국 서쪽 끝 도시 신장자치구 카슈가르(喀什)와 파키스탄 남부 과다르(Gwadar)항을 잇는 약 1300㎞의 대역사로 최근에 뜨거운 이슈가 된 길이다.

탐사대는 동북쪽 우르무치방향으로 향한다. 쿠처까지는 약 710km. 쉬지 않고 8시간 쯤 달려야 하는 길이다. 고속도로 진입까지는 백양나무, 호양나무 등 가로수들이 산들산들 배웅을 해주었으나 시내를 벗어나자 논과 밭이 잠시 보이다가 이내 황무지로 변해 버린다. 지금도 퇴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고비탄 사막이다.

풀 한포기 찾기 힘든 사막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외로운 길, 망망대해를 쪽배를 타고 항해하는 느낌이다.

사막 위에 만들어진 타리무사막고속도로(塔里木沙漠公路)는 항상 바람과 모래와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

오죽하면, ‘중국 사막은 '자연의 공격'과 '인간의 수비'가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전쟁터’라 표현하겠는가. 모래로부터 도로를 지키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한도 끝도 없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둘러 싼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주변에는 오늘도 녹화공정(绿化工程)으로 분주하다.

그 지리한 사막 길을 동쪽으로 재촉하여 아커쑤(阿克蘇)로 향한다.

아커쑤 인근 커핑현(柯坪县)을 지나자 고속도로 왼쪽으로 길게 뻗은 야단디마오(雅丹地貌)가 따라온다. 그 길이가 장장 100킬로미터가 넘는다.

야단(雅丹-바람에 의해 깎이거나 다른 침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지형)이란 위구르 말로는 ‘흙무덤으로 이루어진 절벽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마귀성(魔鬼城)이라는 뜻이다.

장구한 세월동안 사암과 흙이 바람과 비에 침식되어 만들어진 지형이 큰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귀신의 울음소리와도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과연 그러하다.

강한 바람에 혹은 빗물에 씻겨 만들어진 물결 같은 무늬와 지형들이 현란하다.

세월은 무엇이든 형언하기 어려운 절경으로 바꾸어 버리는 힘이 있다.

아커쑤(阿克蘇) 근처 야단디마오(雅丹地貌)지형지대
아커쑤(阿克蘇) 근처 야단디마오(雅丹地貌)지형지대
아커쑤(阿克蘇) 근처 야단디마오(雅丹地貌)지형지대
아커쑤(阿克蘇) 근처 야단디마오(雅丹地貌)지형지대

도로주변으로 녹색 밭과 초지가 보이면 아커쑤에 다왔다는 뜻이다.

톈산산맥(天山山脈)의 남쪽 기슭 아커쑤(阿克蘇).

예로부터 아커쑤강 유역의 정치·상업 요충지로, 신장 남부지역의 경제와 교통의 중심지였던 오아시스였다. 남쪽은 타클라마칸사막이 지키고 있다.

카슈가르(喀什)에서 쿠처(庫車)가는 길의 3분의 2는 온 셈이다.

아커쑤의 논과 밭, 나무들을 보자 동행한 중국감독관도 새로운 풍경에 놀라 몇 마디 거든다.

“이 지역이 옥토로 변하고 타클라마칸사막 일대가 상전벽해가 됐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막에서 대단위의 포도와 대추와 무화과, 심지어 고추와 벼농사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정부의 어마어마한 투자와 관심의 결과라는 것이다.

중국 정권 수립 후, 중국군 생산건설병단(공병대)이 투입돼 아커쑤(阿克蘇), 마나스(瑪納斯) 등지에 꾸준히 인공수로를 건설해 농지를 확장했고, 그 땅에서 밀, 옥수수, 벼, 목화 등을 재배하여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중국정부 덕이라는 이야기다. 소수민족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경제의 평등이라는 개념을 실천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의 결과라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자화자찬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 같은 외지인이 보기에도 신장이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갈 때마다 양파껍질 벗기듯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 발전하는 속도에 놀란다.

톈산산맥(天山南脈)의 발치에 있는 아커쑤(阿克蘇)에서 하룻밤을 자고 쿠처(库车)로 향한다.

쿠처(库车)는 아커쑤와 옌치(焉耆, Karashahr)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로 타리무분지를 통과하는 실크로드의 북쪽 노선 상에 자리 잡은 중심지다.

약 2200년 전 실재했던 국가로 동아시아에 불교를 전파했던 실크로드의 요지이자 동서 문명의 교류지로 번영했다.

때로는 독립왕국으로, 중국의 힘이 강할 때는 직접 통치도 받았던 위구르인들의 국가 신장(新疆). 그 중에도 중원문화와 서역문화가 공존했던 옛 도시 쿠처(庫車, Kuche)는 다양한 문화유적과 유구한 역사로 특별하다.

쿠처(庫車) 중심가 풍경
쿠처(庫車) 중심가 풍경
쿠처(庫車) 중심가 풍경
쿠처(庫車) 중심가 풍경

<서유기(西遊記)>에서는 ‘여인국(女人國)’의 배경이 되는 곳이자 신장 지역 석굴 5분의 3이 있는 ‘석굴의 도시’다.

키질천불동이나 이슬람 사원인 쿠처대사(库车大寺) 등 둘러볼 곳이 많지만, 다양한 색채를 뽐내는 천산신비대협곡(天山神秘大峡谷)이 가장 인기가 있다. 중국판 그랜드 케니언이다.

사막 속에 숨어 있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 쿠처다.

쿠처란 위구르족 언어로 ‘역사가 유구하다’는 의미다. 쿠처는 여러 가지 별명이 있지만 그 중에서 ‘노래와 춤의 고향’이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는 듯하다.

중국 서부지역 가무의 대표로 손색이 없는 쿠처의 츄즈(Chuze -쿠처의 옛 지명)가무는 인근의 많은 국가들은 물론 중국의 음악, 춤, 서커스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쿠처의 명물인 석굴도 보고 백살구를 먹으면서 전통무용인 츄즈가무를 보려면 쿠처를 직접 방문하는 방법밖에 없다.

쿠처는 우리와도 역사적으로 인연이 있는 도시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따르면 서기 727년 11월 신라의 혜초스님이 해로를 통해 인도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오는 길에 카슈가르를 거쳐 이곳 쿠처를 경유했다.

혜초스님과 동시대 인물로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장군도 아버지 고사계(高舍鷄)를 따라와 쿠처에서 군인으로 성장했다.

쿠처는 기원전 1,2세기부터 중국의 사서에 '구이쯔(龜玆國, kucha)'로 등장하는데 고대 서역의 36국 중 하나로 중국과 뺏기고 빼앗는 영토전쟁으로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다.

오아시스 육로의 지정학적 요지에 자리 잡은 까닭에 중국의 한나라 왕조는 시종일관 이곳을 중시해 왔다. 전한이 멸망하자 쿠처는 흉노와 제휴해 카슈가르를 속국으로 만들어 세력을 키웠으나 후한 때인 73년 반초 장군에게 점령당한다. 이후 당나라 때 다시 서역을 평정한 뒤 전 지역을 호령하기에 이른다.

쿠처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쿠처고성유적지는 바로 당나라 시대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즉, 안서사진(安西四鎭)이라 일컫던 옌치(焉耆), 유티엔(于闐). 쿠처(库车). 카시(喀什) 등 4곳을 지키기 위한 군사지휘부가 있던 곳이다. 고구려 유민으로 서역을 방어하는데 크게 기여한 고선지 장군은 전장에 나설 때마다 이 곳 쿠처 고성에서 출정했다. 그는 5차례에 걸친 서역원정을 통해 현재의 중국의 영토라인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 받는 영웅이 됐다. 그러나 이곳 어디에도 난세의 영웅 고선지를 기리는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북쪽 성벽이 있던 곳에 ‘쿠처고성유지(龜玆故城遺址)’라는 입석만 덩그러니 서있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접경지역에 있는 성벽은 도로를 내면서 끊어져 있다. 토성은 세월의 무게로 대부분 유실되고 일부는 밭으로 변해버렸다. 누가 그 옛날 2만4천여 명의 군사가 주둔한 곳이라 믿겠는가. 아스라한 흔적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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