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첫날로 다시 보내줘

이현수 승인 2021.09.30 15:27 | 최종 수정 2021.09.30 15:37 의견 0

연휴가 지난주에 끝났군요. 다시 연휴 첫날로 돌아가고 싶네요. 그래서 오늘은 타임루프물입니다.

타임루프Time Loop는 시간여행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과거 혹은 미래로의 이동이 아니라 시간의 특정 구간이 계속 반복되는 현상이다. 보통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루프에 갇히는 것이 기본이나, 주인공의 의지로 계속해서 같은 시간대로 돌아가는 것,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지만 주인공은 계속 루프에 갇혀있는 것도 타임루프로 치도록 하겠다. 왜 인간들은 이런 스토리를 만들었고 이 이야기들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살펴보자.

‘시시프스Sisyphus’ (1548 ~ 1549,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237X216, 캔버스에 유화, 프라도 미술관 Museo Nacional del Prado, 마드리드 Madrid)
‘시시프스Sisyphus’ (1548 ~ 1549,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237X216, 캔버스에 유화, 프라도 미술관 Museo Nacional del Prado, 마드리드 Madrid)

이 장르의 큰 형님격인 시시프스. 끊임없이 바위를 언덕 위로 올리는 루프에 갇혀있다. 메인 타인라인은 앞으로 진행하나 시시프스 개인의 타임라인은 언덕 아래와 언덕 위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개인적 타임루프라고 불러야하나 공간의 루프라 불러야하나 혼돈되지만 그의 입장에서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데스루프
데스루프

이 장르의 가장 최신 작품 ‘데스루프 Deathloop’ (2021, 딩가 바카바Dinga Bakaba, 아케인 스튜디오 Arkane Studios, 베데스다 소프트웍스 Bethesda Softworks). 하루 안에 7명의 인물을 모두 암살하지 못하면 루프가 다시 시작된다. “처음에 성공하지 못하면...죽고, 죽고, 또 죽는다. If at First You Don't Succeed...Die, Die Again.”라는 캐치프레이즈가 타임루프물의 특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가장 고전과 가장 최신작을 살폈으니 이제 영화에서 이 장르의 선구자 역할을 한 작품을 만나보자. 모두들 예상했듯 바로 그 작품,

사랑의 블랙홀
사랑의 블랙홀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1993, 해롤드 래미스 Harold Ramis, 1시간 41분) 되시겠다. 이 작품의 주인공 필 Phil (빌 머레이 Bill Murray)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하루를 산다. 이 타임루프에서 탈출 방법은 무엇인가?

잠시 스크루볼 코미디 Screwball Comedy와 로맨틱 코미디 Romantic Comedy 이야기를 해보자. 토마스 샤츠Thomas Schatz의 ‘할리우드 장르: 내러티브 구조와 스튜디오 시스템Hollywood Genres: Formulas, Filmmaking, and The Studio System’에서 미국 영화 장르의 하나로 언급한 스크루볼 코미디. 1930년대 대공황기에 시작된 이 장르는 남녀의 연애를 거의 전쟁 수준으로 바꿔놓았다. 도저히 공존이 불가능한 남녀, 그러나 같은 공간/시간에 머물러야만 하는 물리적 상황, 그 안에서 벌어지는 말의 전쟁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말의 전쟁이다. 엄청난 양의 대사를 미친 듯이 쏘아댄다.), 그리고 물과 기름이 결국 하나가 되는 기적적인 엔딩. 전통 스크루볼 코미디는 1940년대 이후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이 장르의 후계자들은 지금도 열심히 증오하던 남녀를 결국 서로 사랑하게 만들면서 열심히 세상에 사랑을 전파하는 중이다.

스크루볼 코미디의 먼 일본 후계자 ‘카구야님은 고백받고 싶어~천재들의 연애 두뇌전~ かぐや様は告らせたい?~天才たちの恋愛頭脳戦~’ (2019 ~ , 3시즌)
스크루볼 코미디의 먼 일본 후계자 ‘카구야님은 고백받고 싶어~천재들의 연애 두뇌전~ かぐや様は告らせたい?~天才たちの恋愛頭脳戦~’ (2019 ~ , 3시즌)

이 스크루볼 코미디의 장르적 특성이 무엇인가 하니 남녀가 계속해서 일정 거리를 맴돌면서 절대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관계가 시작하고 진전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반복된다는 말이니, 그야말로 관계의 루프라 할 수 있다. ‘사랑의 블랙홀’은 이 장르의 이야기 구조에 대한 영화 형식적인 답변인 셈이다. 그렇다면 루프는 어떻게 끝낼 수 있는가?

로맨틱 코미디의 이야기를 해보자. 로맨틱 코미디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가? 로맨틱 코미디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남녀의 알콩달콩 사랑이야기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핵심을 한참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가 실패하는 지점 역시 바로 여기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중심에는 ‘인간의 성장’이 있다. 사랑은 이 성장에 뒤따라오는 요소일 뿐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은 성장하지 못한 아이 같은 성인, 어딘가 결핍된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들이 자신과 정반대 성향을 가진 이성을 만나고 사사건건 대립한다. 자신이 지난 세월 굳게 쌓아온 좁은 세계가 침범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 주인공은 자신의 좁은 시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주인공의 내면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상대를 사랑하게 되면서 아이는 성인이 되고자 하며, 결핍된 자는 그 결핍을 채우고자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세계는 쉽게 섞이지 못하는 법. 사랑하는 이는 떠난다. 그러나 성장하고자 마음 먹은 주인공은 그 결심을 꺾지 않는다. 이제는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변하고자 한다. 힘겹게 변화한 주인공, 성장한 주인공은 이제 사랑도 이루게 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As good As It Gets’ (1997, 제임스 L. 브룩스 James L, Brooks, 2시간 19분)의 주인공 멜빈 Melvin (잭 니콜슨 Jack Nicholson)의 대사는 이 장르의 핵심을 궤뚫고 있다.

브루스 올마이티
브루스 올마이티

신의 권능을 가지게 된 브루스 Bruce (짐 캐리 Jim Carrey)가 마지막에 택한 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브루스 올마이티 Bruce Almighty’ (2003, 톰 새디악 Tom Shadyac, 1시간 41분)

이 작품들의 결말도 생각해보라. ‘날 미치게 하는 남자 Fever Pitch’ (2005, 바비 패럴리 Bobby Farrelly, 피터 패럴리 Peter Farrelly, 1시간 44분). ‘40살까지 못 해본 남자 The 40 Year Old Virgin’ (2005, 쥬드 애파토우 Judd Apatow, 1시간 56분),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Shallow Hal’ (2001, 바비 패럴리 Bobby Farrelly, 피터 패럴리 Peter Farrelly, 1시간 54분).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에서 이성과의 사랑만 빼고 인간의 성장 부분만을 특화시킨 놀라운 이야기의 영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Lars and the Real Girl’ (2007, 크레이그 길레스피 Craig Gillespie, 1시간 46분)

그리고 국회의원들에게 부탁하노니 ‘내겐/그에겐/그녀에겐’ ‘너무 ~ 한’ ‘남자/여자/그/그녀’라는 제목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다양한 제목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걸작 로맨틱 코미디들을 싸구려 양산품마냥 만들어버린 제목들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대한 오해에 일조했고, 로맨틱 코미디를 이해하지 못 한 채 로맨틱 코미디를 만드는 비극에도 어느 정도 이유가 되었다고 본다.

앞서 ‘사랑의 블랙홀’이 로맨틱 코미디/스크루볼 코미디의 장르적 특성을 타임루프라는 형식으로 표현한 영화라고 했다. 그럼 이 영화에서 루프를 끊는 것은? 바로 주인공 필의 성장이다.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한 그에게 시간은 미래로의 전진을 허락해준다. 자신만의 좁은 세상은 그 안에서 자아와 세상을 빙빙 돌게할 뿐 아니라 시간마저 돌게한 것이다. 그 세상의 벽을 허물고 성장했을 때 시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슈타인 성님은 말씀하셨다. 질량을 가진 물질은 시공간을 휘게 한다고. 그래서 엄청난 질량을 가진 물질은 시공간을 너무나 휘게 만들어 빛과 시간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블랙홀을 만든다. 좁은 세상에 아집으로 뭉친 비대한 자아는 그렇게 블랙홀이 되어 시간마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분량 조절에 실패하는 글쓴이도 시공간을 휘게 하여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다른 장르의 타임 루프물을 살펴보겠다. 게임 ‘아우터 와일드 Outer Wilds’ (2019, 알렉스 비첨 Alex Beachum, 론 베르누이 Loan Verneau, 모비우스 디지털 Mobius Digital,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 Annapurna Interactive), ‘나비효과 The Butterfly Effect’ (2004, 에릭 브레스 Eric Bress J. 맥키 그루버 J. Mackye Gruber, 1시간 54분), ‘해피 데스 데이 Happy Death Day’ (2017, 크리스토퍼 랜돈 Christopher Landon, 1시간 36분) 그리고 영상매체 역사상 최고의 타임루프물이 등장할 예정이다.

p.s.

메인 타임라인은 앞으로 진행하고 있으나 혼자 타임루프에 빠진 주인공을 다룬 색다른 로맨틱 코미디, ‘첫 키스만 50번째 50 First Dates’ (2004, 피터 시걸 Peter Segal, 1시간 39분).

하루라는 타임루프에 갇힌 여주인공. 그 타임루프를 계속 지속시키려는 가족들. 메인타임은 앞으로 진행하나 혼자만 타임루프에 빠진 사람, 그러나 타임루프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은 과감하고 진보적인 결정을 내린다. 매번의 타임 루프를 다르게 만들어 준다.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이미지출처=‘Sisyphus’ (Museo Nacional del Prado), ‘Deathloop’ (Bethesda Softworks), ‘かぐや様は告らせたい?~天才たちの恋愛頭脳戦~’ (A-1 Pictures), ‘Groundhog Day’ (Columbia Pictures), ‘As good As It Gets’ (TriStar Pictures), ‘Bruce Almighty’ (Universal Pictures), ‘Fever Pitch’ (Twentieth Century Fox), ‘The 40 Year Old Virgin’ (Universal Pictures), ‘Shallow Hal’ (Twentieth Century Fox), ‘Lars and the Real Girl’ (Metro-Goldwyn-Mayer [MGM]), ‘50 First Dates’ (Columbia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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