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티베트 38편] 신짱꽁루이야기

김숙경 기자 승인 2021.09.10 13:33 | 최종 수정 2021.09.10 13:45 의견 0

지샨따판에서 내려와 처음만난 마을 대훙류탄(紅柳灘). 붉은 버드나무라는 훙류(紅柳)가 만발해서 마을이름이 됐다는데 훙류는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한다. 서부영화에나 나옴직한 황야에 토담집 몇 채가 전부다. 고원의 바람에 흙먼지가 회오리를 치고 타루초만 찢어져라 나부끼는 곳이다. 이 대훙류탄에서부터 해발고도가 낮아지고 기후도 훨씬 따뜻해져서 여행자들에게는 심리적으로 여유를 준다.

동네 마당에서는 너무 허름해서 과연 공이 굴러갈까 싶은 당구대에서 게임이 한창이다.

가끔 그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허허벌판에 퍼지고, 그들을 보는 우리도 미소를 지으며 길을 재촉한다.

대훙류탄(大紅柳灘)마을 풍경
대훙류탄(大紅柳灘)마을 풍경
대훙류탄(大紅柳灘)마을 풍경
대훙류탄(大紅柳灘)마을 풍경
대훙류탄(大紅柳灘)마을 풍경
대훙류탄(大紅柳灘)마을 풍경

흉류탄에서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산시리잉팡(三十里營房)으로 향한다.

해발 4천 미터의 훙류탄에서 해발 3천 미터의 산시리잉팡으로 내려가면서 머리는 더 맑아지고 몸은 날듯이 개운해진다. 고소증세에 위축됐던 몸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신짱꽁루에서 그나마 크고 번화한 곳 중의 하나라는 산시리잉팡(三十里營房)은 호탄하(和田河)의 지류인 카라카시하(喀拉喀什河)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 크고 작은 자동차정비소, 주유소, 여관과 식당이 다양하게 있는 동네다. 아스팔트도로를 사이에 두고 형성된 마을로 그리 크지 않지만 천리 길을 달려온 여행자에게는 오아시스다.

정작 난관은 산시리잉팡(三十里營房)에서부터였다.

중국감독관의 말이, 앞으로 지나갈 예청까지 280킬로미터 구간은 군사보호지역으로 사진촬영은 물론 절대 정차하거나 하차할 수 없으니 미리미리 화장실을 다녀오란다. 도대체 어떤 지역인데 그럴까 하면서 길을 나선다.

강디쓰산맥(岡底斯山脈)을 벗어나면 카라쿤룬(喀喇崑崙)산맥, 즉 카라코룸산맥(Karakorum range)으로 접어들게 된다.

아찔한 낭떠러지 길을 따라 아흔아홉굽이를 지나야 허이카따빤(黑卡大坂), 마짜따빤(麻札大板, 4,969m)을 넘는다. 티베트의 마지막 산인 쿠디따빤(庫地大板, 3,150m)까지 100여 킬로미터는 그야말로 첩첩산중, 구절양장의 길을 넘어야 예청으로 갈 수 있다.

짱꽁루에서 본 K2 봉우리
짱꽁루에서 본 K2 봉우리

허이카따빤(黑卡大坂)을 지나서 30분 쯤 됐을 때였다. 군사보호지역이라 절대로 하차하면 안된다던 중국감독관이 엄포와는 달리 다행스럽게도 한번의 정차를 허락한다.

벌써 한 달 넘게 동행한 중국감독관도 꽌시(关系)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 터였다. 운 좋게 날씨가 좋아 K2봉(8,611m, 세계 제2위 봉우리)이 보이자 잠깐 시간을 내주었다. 앞산에 가려 전체를 볼 수 없지만 약 8부 능선부터 정상부위를 볼 수 있었다. 아쉬움과 함께 우리가 파키스탄 방향으로 가고 있음도 짐작해 본다. 히말라야 자이언트 봉우리 14중에 K2는 파키스탄에 있기 때문이다. 참 멀리 왔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우리가 지나던 지점 인근 150여 킬로미터에 중국의 우주센터가 있고 미사일기지가 다수 있다고 한다. 인도, 파키스탄과 국경분쟁을 대비한 중국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보이는 대목이다. 오래 머물다가 군인들에게 시비가 될 수 있다는 중국감독관들의 성화와 협박으로 이내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쿠디따빤(庫地大板)은 비록 높지는 않지만 신짱꽁루에서 그 기세가 제일 장관일 만큼 거칠다. 우리는 길의 형편에 맞게 속도를 낮춰 기나긴 하산을 한다.

쿠디(庫地)의 공안검사참(公安檢査站)에서 여권검사를 한 뒤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도로는 포장되어 더 넓어지고 평온하다. 차창으로 스치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고 가름하며 덥수룩한 수염과 날이 선 코를 가진 사람들로 즐비하다. 여전히 먼지 많은 거리는 당나귀 수레와 채찍을 휘두르며 달리는 마부의 모습이 활기차 보인다.

신장위구르의 첫인상은 다분히 소란하고 매캐한 느낌이다. 그래도 수많은 황토 계곡을 지나고 아홉 개의 큰 고개를 넘어서 만나게 되는 예청은 왠지 과거에서 현대로 귀환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예청(叶城)

예청은 티베트와는 또 다른 풍경을 가진 마을이다. 무슬림사원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다. 크지 않은 시장(바자르)이지만 활기찬 모습이 티베트와는 사뭇 다르게 사람 살만한 곳이라고 느껴진다.

다음 날 아침.

예청의 아침은 분주하다. 어제 늦게 도착한 터라 미처 보지 못한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왕복 6차선의 대로에는 세상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과 탈 수 있는 것들이 모두 나와 전후좌우로 뒤섞여 난리도 아니다. 일행은 이 엉망진창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걱정스럽다. 차들은 빵빵거리고 오래된 경운기를 개조한 차의 배기통에서는 시커먼 매연이 공장 굴뚝이다.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얽힌 일대 교통대란 중에도 해맑게 웃는 소년, 소녀들. 그 와중에도 어깨와 등에 커다란 보따리를 지고 차들 사이로 날쌔게 뛰어다니며 하루를 준비하는 서민들의 모습에서 위안을 찾는다.

신짱꽁루에서 만난 양떼와 여인
신짱꽁루에서 만난 양떼와 여인

간신히 예청 중심가를 빠져나와 신장(新疆)과 시짱(西藏·티베트)을 연결하는 신짱꽁루(219번 국도)에서 315번 국도로 갈아타고 카슈가르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세 겹으로 심은 백양나무 가로수는 농익은 진노랑색 가을 향기를 머금은 채 도로와 동행하고 있다.

최근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 아스팔트도로에는 대형트럭과 오토바이, 경운기, 당나귀 마차까지 굴러다닐 수 있는 모든 것이 튀어나와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여행자에게는 낯설고 경악스러운 일이지만 여기서는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길옆에는 백설 같은 꽃을 단 목화밭과 누렇게 익어가는 칭커밭에서 가을 추수에 신이 난 농부들의 환한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예청을 벗어나 고속도로 대신 구도로를 따라 다시 거친 황야를 질주한다. 이름 모를 하천을 끼고 가파른 산길을 달리기도 한다.

사막은 모래와 바람이 만든 기기묘묘한 사구만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사막으로 가는 길은 고비탄(Gobitan)이라는 거친 길을 지나야 만날 수 있다. 고비탄이란 흙과 모래, 자갈 등이 섞인 ‘몹쓸 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행히 몇 년 전, 도로포장이 시원하게 되어서 예전 같은 고행 길은 사라졌다.

고비탄(Gobitan) 사막과 끊어졌던 비포장도로가 모두 포장이 되어 황량한 ‘몹쓸 땅’은 이제 구경거리가 됐다.

세상은 참 빠르고 무섭게, 중국 사람들도 참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예청에서 카슈가르까지는 약 230킬로미터쯤 된다.

그 사이에 16-17세기 위구르왕국 야르칸트(Yarkant 1514-1682)의 왕 압둘 루시티함(Abdur Rhushitiham)과 왕비 아마니샤한(Amanni Shahan, 阿曼尼沙罕)의 무덤이 있다는 사처(砂車)를 지난다. 시인이자 민속음악을 연주한 예술가이기도 했던 왕비는 당시 야르칸트 주변의 뮤캄(木佧姆, Mukamm)이라는 민속음악 12종을 모아 집대성했다. 이 지역 음악의 모태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지나치기 정말 아까운 도시지만 일정상 어쩔 도리가 없다. 시간이 되면 꼭 들러보고 싶은 마을이다.

카슈가르 남쪽 60km 쯤에 위치한 잉지샤 (英吉沙, 또는 Yengisar)에 이른다.

​잉지샤는 우리나라의 면소재지만한 작은 도시다. 이 오지 촌동네도 10여 년 전과는 확연하게 다르게 현대화되었다. 먼지 폴폴 날리던 비포장도로변에 위치했던 시골은 온데간데없고 오성홍기(五星红旗)가 게양된 빌딩과 건물들이 즐비하다.

​잉지샤하면 ‘칼’이다. 마을 초입부터 도로변 간판에서 그 면모를 확인시켜 준다. 칼을 주제로 한 간판과 조형물에 새긴 ‘世界之最一刀’라는 문구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잉지샤 사람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길거리에 좌판형태로 칼들이 전시되고 호객도 했지만 현대화된 이후로 대부분 실내로 옮겨졌다. 가게 내부는 다양한 칼이 진열 되어있고 가끔은 칼을 제작하는 모습도 보인다.

잉지샤(英吉沙)라는 마을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절인가 싶었었다. 알고 보니

'이곳 잉지샤(英吉沙)가 토질이 나쁘고 물까지 부족하여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니, 하늘에서 칼 잘 만드는 기술자들을 내려 보냈다. 그들이 칼을 워낙 잘 만드니 동네가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었다'

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위구르어로 신도시(新城)를 의미하는 '​잉지샤(英吉沙)'로 부르게 되었다.

투루판의 포도, 하미과(수박), 호탄의 옥이 유명하듯이 신장 지역에서는 아랍식 전통 수공예 방식으로 만드는 ‘'잉지샤의 작은 칼(英吉沙小刀)'이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특산품이다. ​

위구르인들에게 칼은 필수 소지품이자 장식품이다. 항시 휴대하고 다니며 양고기, 소고기 와 하미과를 잘라 먹는다. 중국 정부에서도 이런 풍습을 인정하여 위구르족에게는 칼을 휴대하고 다닐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요즘의 잉지샤는 세상의 변화에 대응이라도 하듯 상품이 다양화되었다. 예전에는 소형칼, 부엌 칼 등 오로지 칼만 만들었지만 지금은 화장용 손거울, 보석함, 손톱깎이 등 돈되는 것은 다 만든다.

아쉬운 것은 이곳도 트렌드를 반영하여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용도와 디자인의 칼도 팔고 있으나 정작 잉지샤産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구르족의 전통 수공예품으로 솜씨가 정평 있는 칼의 고향 잉지샤(英吉沙)라서 아쉽다.

잉지샤의 상인들은

"이곳의 칼은 모두 수공업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같은 물건이 거의 없지요. 품질이 좋아 최고의 칼로 자부합니다."

라고 하지만 예전방식으로 담금질하고 제련하는 방식은 일부고 주조된 강철을 가져다가 성형하는 것이 적지 않다고 안내인이 귀띔한다. 가격을 보니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편리하게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장인들의 경험과 노력이 빛나는 잉지샤의 전통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싶었다.

요즘의 잉지샤는 세상의 변화에 대응이라도 하듯 상품이 다양화되었다. 예전에는 소형칼, 부엌 칼 등 오로지 칼만 만들었지만 지금은 화장용 손거울, 보석함, 손톱깎이 등 돈되는 것은 다 만든다.

아쉬운 것은 이곳도 트렌드를 반영하여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용도와 디자인의 칼도 팔고 있으나 정작 잉지샤産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구르족의 전통 수공예품으로 솜씨가 정평 있는 칼의 고향 잉지샤(英吉沙)라서 아쉽다.

잉지샤의 상인들은

"이곳의 칼은 모두 수공업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같은 물건이 거의 없지요. 품질이 좋아 최고의 칼로 자부합니다."

라고 하지만 예전방식으로 담금질하고 제련하는 방식은 일부고 주조된 강철을 가져다가 성형하는 것이 적지 않다고 안내인이 귀띔한다. 가격을 보니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편리하게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장인들의 경험과 노력이 빛나는 잉지샤의 전통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싶었다.

잉지샤
잉지샤
잉지샤(英吉沙)의 수제칼
잉지샤(英吉沙)의 수제칼

거리에는 여행자와 관광객들의 쇼핑이 여전하다. 가격을 흥정하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흥미로운 일. 가게마다 몇 자루의 칼을 들고 사네마네하며 실랑이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이곳 사람들도 우리 시장통에서 흥정하듯 하면 꽤나 많이 깎아주기도 한다.

사람 사는 것은 대략 비슷하지 않은가.

​혹시 이 먼 잉지샤까지 오면 기념품으로 한 개쯤 가져볼 만하다.

상당히 정교하고 유니크한 칼 제품이 다양하고 저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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