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티베트 36편] 구게왕국

백민섭 승인 2021.08.27 11:37 | 최종 수정 2021.08.27 11:43 의견 0
구게왕국(古格王国, Guge)
구게왕국(古格王国, Guge)

짜다토림에서는 구게왕국의 유적지를 빼놓을 수 없다. 황토언덕 위에 위치한 왕국의 옛터는 왕궁과 사원, 방어시설과 주거지 등이 조화를 이룬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세월의 비장함을 감안하더라도 700년 세월을 굳건히 지켜낸 왕국은 허름해 보여도 그 기상만큼은 늠름하다.

수트레지강이 만들어 놓은 깊은 협곡에 수직으로 300미터나 되는 황토산 위에 왕국이 있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기도 전에 발길이 바빠진다. 해가 뜨기 전이라 가장 감상하기 좋은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 왕국 건너편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팸플릿 사진으로만 눈에 익혀왔던 백묘(白廟)와 홍묘(紅廟), 산꼭대기의 여름궁전이 가장 먼저 시선을 끈다. 그 아래 불탑과 성벽, 망루와 사찰 등 300 여 채의 가옥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하고, 사람들이 거주한 듯한 300 여 개의 동굴이 황토 산을 벌집처럼 만들어 놓았다. 건축물 지붕이 대부분 유실되어 온전한 모양을 갖춘 것이 거의 없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아침 햇살이 왕국의 머리 꼭대기에 다다른다. 암갈색 황토 산이 황금빛으로 바뀌기 시작하자 천 여 년이나 침묵하고 있던 역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아! 그 아름다움이란…

구게왕국 전경
구게왕국 전경
구게왕국의 무너진 토굴들
구게왕국의 무너진 토굴들

폐허가 된 왕국의 전설이 바람결에 전해지자 순식간에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구게의 역사 속으로 빠져든다. 구게왕국은 원래 토번왕조의 후예가 9세기에 건설한 지방정권이었다. 토번의 마지막 왕인 랑다마(朗達瑪)가 피살된 후 형과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랑다마의 둘째 아들인 지더니마(吉德尼瑪)는 라싸를 탈출해 아리로 와서 왕국을 건설한다. 이후 지더니마의 세 아들이 아리지역을 나눠가지면서 인도 북서부 파키스탄과 접경지역인 캐시미르의 라다크(Ladahk)왕국과 인도, 네팔과의 접경지역인 서부 티베트의 푸란(普蘭)왕국, 그리고 구게(古格)왕국으로 분할된다. 그 중 가장 강력했던 나라가 구게왕국이다. 한때는 서쪽으로 캐시미르(Kashmir) 일대와 파키스탄 일부 지역까지 통치권이 미쳤었다. 화려하던 구게왕국이 어떻게 연기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지는 미스터리다.

당시 인도 북부에서 확장한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멸망했다는 설이 있지만, 1635년 구게왕국의 내분을 틈탄 라다크왕국의 침략으로 멸망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왕국은 찬란했던 만큼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모양이다. 토성 하단부의 토굴에는 꽤 많은 목 없는 유골과 미라가 남아있다.

왕국을 건설했던 수많은 구게왕국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구게왕국의 화려했던 옛 모습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17세기 초 멸망할 때까지 16대에 이른 왕조가 700년 동안 창성했던 왕국의 영화는 무상한 역사와 세월의 풍상에도 그 기품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인상적인 것은 20세기 초 영국 탐험가들(유물 도굴꾼들)에 의해 발견된 불교미술이다. 금으로 채색된 다수의 벽화는 인도 후기 불교인 밀교(密敎)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도굴꾼들에게는 맞춤한 약탈 대상이었고, 문화혁명 때는 파괴의 대상이었던 불교 미술품들은 숱한 곡절에도 어제 그린 듯 살아남아 수백 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구게왕국의 불교벽화
구게왕국의 불교벽화
구게왕국의 불교벽화
구게왕국의 불교벽화

토굴에 수백 년 동안 숨어있던 독특한 벽화는 티베트와 인도의 불교양식이 어울려 구게의 양식으로 구현됐다.

일출에 비친 구게왕국의 신비를 감상하고 왕국 유적지에 들어가려 했으나, 보수공사 중이라 일부만 관람이 가능했다.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황토산 꼭대기의 여름궁전과 산 아래 겨울궁전을 연결하는 인공터널과 2Km에 달하는 회전식 취수도(取水道)를 이용하여 산꼭대기에 물을 끌어 올렸다는 신기한 시설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수세기 동안 어두운 동굴 속에 간직한 밀교(密敎)의 진수가 고스란히 보존된 벽화 역시 몇 점 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왕국의 이모저모를 둘러본다. 적군을 막아주던 성벽도 대부분 무너지고, 토굴들도 많이 파손되어 그 옛날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추측해 볼 뿐 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마니석 무더기만이 천 년 왕국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듯 쌓여 있을 뿐이다.

도대체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척박한 땅에 불국토를 만들어 삶을 개척했던 구게왕국 사람들도 세월의 무상함에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왕조는 사라지고 유적 유물만이 남아 찬란했던 왕국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행은 왕국의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하고 행장을 꾸려 다시 길을 떠난다.

새벽부터 달려 온 ‘다와쫑’의 비경은, 이제 되짚어 나가야 하는 악명 높은 길이 된다. 천 년의 폐허 구게왕국과 ‘달빛의 성’ 다와쫑(獨克宗)을 벗어나 고갯마루에 서자 멀리 토림을 병풍 삼은 짜다현이 오아시스처럼 보이고, 계곡 아래로는 수트레지강이 실뱀처럼 비늘을 반짝이고 있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일. 잊지 않으려 다시 한 번 눈에 넣어 둔다.

우리는 서쪽으로 다시 길을 잡아 나간다. 수많은 고개와 개울을 넘고 건너고 광야를 온종일 헤맨 끝에 찾게 될 또 다른 샴발라를 향해서.

구게왕국에서 본 수트레지강과 짜다토림
구게왕국에서 본 수트레지강과 짜다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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