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스물한 번째] 민들레 전쟁

김원경 승인 2021.05.15 08:58 | 최종 수정 2021.05.15 09:09 의견 0

캐나다에서 우리가 고른 집은 그림 같은 집이었다.
앞마당에 커다란 메이플 나무 네 그루가 있고 뒷마당은 축구장의 반 정도 되는 넓이의 잔디밭에 자작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2층짜리 돌집. 거실에 벽난로가 있었고 뒤뜰 파티오에서 고기도 구울 수 있었다. 한국 같으면 이런 마당 넓은 집에 사는 걸 꿈도 꾸지 못했을 테지만 여기서는 이 가격에 우리 집이 되다니 흥분돼서 전율했었다. 

캐나다에 이민 오고 6개월 정도 임시로 월세방에 살면서 제일 열심히 한 일이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Realtor.ca라는 부동산 매물 사이트에서 맘에 드는 집을 수십 군데 적어놓고 매일 구글맵을 좇아 보러 다녔다. 골라놓은 집들이 많아 중개인에게 모두 다 보여 달랄 수가 없어 일차로 거르기 위함이었다. 동네를 몇 바퀴 돌아보고 매물로 나온 집 근처에 차를 대고 나는 망을 보는 사이 남편이 재빠르게 지붕을 살피고 창틀을 점검했다. 100군데 넘어 본 것 같다. 

집이 적당하면 그제야 중개인에게 연락해 정식으로 집 안을 둘러봤다. 그렇게 메모한 기록들은 임시 거처에 식탁 대신 놓고 쓰던 사과 박스에서 엑셀 파일로 정리하였다. 가격 적합도, 동네 분위기, 집 구조 등의 항목을 세세히 나누고 점수를 매겨 최종 네 후보를 골랐다. 어떤 집이 우리 집이 될 것인가는 네 후보 중 가족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딸아이는 제 방이 제일 컸던 집을 좋아했다. 아들은 지하에 당구대가 있던 집을, 남편은 몽튼 근교의 산언덕에 있던 집을 밀었다. 집 앞 들판에 말들이 뛰어다녔다. 말똥 냄새가 났다. 내가 밀었던 집은 가족 투표에서 3위를 했다. 

3위가 우리 집이 되었다. 딸이 그럴 거면 투표는 왜 했냐고 악을 썼지만, 봄바람에 찰랑거리는 드넓은 잔디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나는 거듭 흥분하였다. 

처음 몇 달은 휘파람을 불면서 정원을 가꾸었다.
남편은 바지런히 몸을 움직여 화단을 새로 만들고 나는 잡초를 뽑았다. 

잔디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자랐다. 잔디 깎기를 네 시간 돌려 겨우 뒷마당을 깎았다. 남편이 이제 앞마당으로 기계를 밀고 가다가 머리에서 뽀얀 김을 내며 퍼지면 나와 아이들이 교대했다.
몸도 힘들지만, 마음도 힘들다. 풀들, 자기들도 살려고 고개를 내미는 것을 그저 나보기 좋자고 혹은 이웃집의 신고가 걱정된다고 댕강댕강 목을 날리는 것 아닌가. 잔디깎기 살 때 점원이 자랑하던 날카로운 칼날은 공포스러운 소리를 냈다. 네 시간의 길로틴질이 멈추고 나면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서 진한 풀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마치 풀들의 피 냄새 같아서 미안하고 울 것 같았다. 

이 짓을 일주일에 두 번을 해야 한다니 기가 막혔다. 게다가 더 심란한 것은 민들레였다. 왜 식물계의 바퀴벌레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뽑아도 뽑아도 끝없이 다시 나오는 민들레. 그냥 두면 잔디를 망치거니와 꽃대 하나에서만 수백 개의 씨앗을 바람에 흩뿌리기 때문에 이웃집으로 금세 번진다. 

남편 손가락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민들레 뿌리를 뽑다가 그리된 것이다.  질긴 생명력만큼이나 뿌리는 깊었다. 우리가 사는 뉴브런즈윅은 제초제를 쓰지 못하도록 금한다. 식초와 세제를 이용하여 말려 죽이는 방법도 있다지만 축구장의 민들레를 다 말려 죽이려면 식초를 드럼통으로 부어야 할 것이다. 

다시 봄이다.
어제는 길을 사이에 두고 이쪽 집은 눈을 치우고 건넛집은 잔디를 깎는 캐나다다운 사진을 건졌다. 이 사진이 말하는 바는 올해의 민들레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눈더미 밑에서 수그리고 있던 민들레들이 여기저기 도발을 시작했다. 참 뻔뻔한 노란색이다. 꽃으로 가장했으나 봉오리 아래로는 공중에 살포할 치명적 씨앗 폭탄을 장전 중인 게 뻔히 보인다. 

10년간의 싸움에서 매번 패하기만 했던 남편과 나는 올해 새로운 작전을 세웠다. 겨우내 부지런히 자료를 모으고 스크랩해 두었다. 이번 작전은 민들레들의 허를 찌르는 기막힌 한 판이 될 것이다. 

작전명 '포공영(蒲公英)' 

꽃이 피기 전에 봉우리째 따서 차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봉우리 속에 강인한 생명력을 품은 수백 개의 씨앗 폭탄들이 뭉쳐있으니 그야말로 생명탄인데 
터지기 전에 똑똑 딴다. 

허를 찔린 민들레들이 속수무책으로 봉오리를 내어주고 있다. 잠깐인데도 봉지가 가득하다. 

잘 씻어 찜기에 3분 쪄서 뒷마당 그늘에 말리느라 채반에 널어놓으니 살아남은 민들레들이 잔디밭 구석에서 샛노랗게 질려 떨고 있다. 
기가 막힌 대승이었다. 전술적 승리이자 전후 평화 시대마저 함께 여는 전략적 빅 픽쳐였다. 

이제 민들레야 너와 싸울 일 없다. 키워서 거둬주마. 

지금 보니 민들레도 예쁜 구석이 있었다. 없애려고 마음먹을 때는 징그럽기까지 하더니 같이 살 방도를 구하니 샛노란 봉우리들이 마치 심어놓은 듯 정겹게 보인다. 

7할가량 그늘에 마른 민들레 포공영을 프라이팬에 5분가량 약한 불로 덖는다. 구수한 커피 같은 냄새가 난다. 냄새가 구수해서 당황했다.
그 치열했던 10년 간의 전쟁에서 본 가차 없는 야만의 냄새가 아니다. 얼른 차로 우려본다. 

생명력을 마시는 기분이다.
아픈 엄마에게 필요한 차다.
민들레의 불굴 의지가 뭉쳐있는 차, 민들레 포공영. 염증도 다스린다니. 

힐스브로 가는 깨끗한 산길에 민들레밭을 봐두었다. 서둘러야겠다.

저작권자 ⓒ OBSW,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