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열아홉 번째] Absurd

김원경 승인 2021.04.17 10:09 | 최종 수정 2021.04.17 10:35 의견 0

가게 문을 닫으려는데 젊은 남자가 황급히 들어 온다. 
급한 숨을 고르면서 미소를 짓는다. 

"안녕하세요" 
한국말 인사다. 복모음 발음이 약간 틀렸지만 분명 한국말이다. 나도 한국말로 인사했다. 

자기 발음이 맞는지 묻는다.
엄지 척하며 "Awesome" 하니 빠른 웃음을 웃는다. 다른 나라 말을 배우는 이에게 끈끈한 동지애를 느낀다. 

캐나다에 처음 발을 디딘 날이 생각난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다.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았고 눈 폭풍까지 왔다. 굶주린 새끼들을 먹이려 몽튼 시내를 몇 바퀴나 돌았지만, 문을 연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가혹한 신세계였다. 겨우 시내와 한참 떨어진 곳에서 문을 연 피자 가게를 발견했다. 
피자로 급한 허기를 달래고 콜라 한잔을 한 번에 다 마신 아들 능현이가 종업원에게 ‘Can I get a refill? 하고 영어로 주문하자 나머지 식구가 'Oh!' 감탄하였다.
종업원이 음료를 금방 가져왔는데 아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콜라에서 물파스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내가 마셔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먹지도 못했지만, 항의도 하지 못했다. 음료값은 추가로 청구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종업원이 refill을 ‘Root beer' 
라고 들은 것이었다. 우리가 물파스를 주문했을 리는 없었다. 하여 네 식구가 입을 모으고 리필과 룻빌을 소리 내어 연습했다. 억울하지는 않았다. 다만 앞날이 불안했다. 

아는 단어가 제일 문제였다. 
우유를 살 때 하도 애를 먹어서 먼저 온 한국분에게 하소연했더니 '밀크' 말고 '미역'이라고 해보라고 알려줬다. 미역을 달라고 했더니 과연 점원이 우유를 내주었다. 

말을 할 때마다 스무고개를 넘어야 의사소통이 되었다. 꾸인(Queen) 베드를 주문할 때도, 사자마자 고장 난 차의 마지율(Module)을 교체할 때도 그랬다. 토라노(Toronto)영사관에 전화를 여러 번 하고 이즈리얼(이스라엘)에서 온 이웃에게 망치를 빌려 못을 박고, 주문한 식탁이 오기 전까지는 주로 맥다늘드(맥도날드)에서 치키노삐(Chicken or Beef) 쌔미치(샌드위치)로 때우며 정착하기 바빴다. 

귀여운 미소 청년이 '카라멜 티'를 찾는다. 
카라멜 티는 따로 없는데  카라멜 향이 들어간 달콤한 블랙티를 찾는 건가?  
내가 머뭇거리자 주섬주섬 손 전화기에서 그림을 보여준다. 

아... 카모마일.  
땅에서 나는 사과라는 뜻을 가진 데이지 꽃차.
항산화 성분이 많아서 오천 년 가까이 약으로 사용된 기록이 있다는 꽃차, 한국 드라마에서 재벌 2세가 쓰러지자 여자 주인공인 비서가 서둘러 대령하던 그 차다. 불안할 때 진정 효과가 있다.
생리통에도 특효약. 

카라멜과 카모마일 꽃차의 사이는 얼마나 먼가. 거의 생리통과 샌드위치만큼이나 먼 사이다. 그걸 여태 섞어 듣는 내 듣기 실력에 한숨이 난다. 

말맛이라는 걸 잃어버린 지 오래다.
새 메뉴를 만들고 SNS에 사진과 함께 설명하는 글을 영어로 적을 때면 말맛이 하나도 없는 공업용 설명서만 쓰게 되니 나 스스로 한심하다. 
어떤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의사 표현을 한다는 것 말고도 말을 맛있게 쓸 줄 안다는 것이다. 수천 년 쌓인 공동의 정서를 나누고 자음과 모음이 합쳐지는 아주 작은 틈새에 온갖 느낌과 감정을 숨기거나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광고의 말맛이 그렇고, 시의 말맛이 그렇고, 통화하다 마가 뜨는 엄마의 짧은 침묵이 그렇고, 첫사랑의 과묵했던 고백이 그렇다. 

매뉴얼식 표현만 하는 한심함에 지친 내가 요사이 말맛을 찾기 위해 애쓰는 영어 공부법이 있다. 구글 이미지에 단어를 처넣고 나오는 수많은 그림을 보는 것이다. 
가령 Absurd를 구글 이미지에 넣고 그림을 본다. 
벌거벗은 통닭과 트럼프 전 대통령, 꽉 막힌 변기, 마그리트의 수수께끼 같은 그림 따위가 나온다. 

화장실에서 긴 용무를 마치고 물을 내렸으나 내용물은 그대로 있고 단지 물만 자꾸 내려가는데 누군가 똑똑 노크하는 딱 그 상황. 

귀여운 총각이 오늘 본 표정도 여기에 추가할만하겠다. 카모마일 꽃차 달랐더니 카라멜을 내어주는 황당한 내 표정. Absu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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