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배상', 필름누아르의 또다른 이름

장서희 승인 2021.03.12 09:52 | 최종 수정 2021.03.12 13:59 의견 0

고전 할리우드의 거장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44년작 '이중배상'은 필름누아르의 원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필름누아르는 플래시백이 흔치 않던 당시 주인공 자아의 분열과 혼란을 부각하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을 역으로 거스르는 플래시백을 즐겨 사용하였다. 필름누아르의 남자 주인공들은 대개 ‘조사자’로서 과거의 진실을 추적해나가는데 이 때문에 탐정, 보험조사관 등의 직업이 자주 등장한다. '이중배상' 역시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 사실을 밝혀나가는 전형적인 구조이지만 그 주인공이 조사자 역할이 아니라 동료인 보험 조사관에게 자신의 범죄 사실을 자백하는 방식으로 또다른 조사자가 병렬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필름누아르를 결정 짓는 대표적인 아이콘은 역시 팜므파탈의 존재이다. 이들은 조사자의 역할을 해나가는 거친 남성 주인공을 유혹하여 자신의 목적에 이용함으로써 그를 파멸에 빠트린다. '이중배상' 역시 전형적인 팜므파탈이 등장해 남자를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필름누아르의 팜므파탈은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사회적인 입지가 강화된 여성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러한 독립적인 여성들에 대한 경계와 응징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자를 지배하고 이용하는 필름누아르의 여주인공들은 더 이상 화사하고 밝은 조명 아래에 위치하고 있지만은 않다. 이들은 매혹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주인공들을 현혹하지만 서서히 그 본색이 드러남에 따라 거친 조명 속에서 피폐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시대 영화에서는 이미 익숙한 소품으로 보일 수 있으나 베니션 블라인드와 계단, 철망 등과 같은 기하학적 구조물 역시 필름누아르를 대표하는 미장센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들 구조물들이나 인물이 드리우는 그림자 역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필름누아르의 표상 중 하나이다. 이러한 기하학적 구조물들은 극중 계속 반복되면서 폐소공포를 유발하며 그 화면에 위치한 주인공들을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운명에 가둬놓곤 한다. 심지어 ‘이중배상’에서는 베니션 블라인드와 그 그림자 샷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에 앞서 네프의 대사를 빌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중배상'에서는 펠리스라는 여인이 보험사 영업사원인 주인공 네프를 이용해 남편을 죽이고 거액의 사망보험금을 받아내려는 계략을 꾸민다. 담배를 즐겨 피우며 특별한 흠도 없이 혼자 살아가던 도시 남자 네프는 펠리스의 유혹에 빠진 나머지 그녀의 남편을 살해하고 보험 사기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펠리스가 생각한 보험금의 두 배를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계획을 꾸미는 대담함도 보인다. 그러나 범죄가 발각될 위기 상황에서 펠리스의 실체를 깨닫게 된 네프는 그녀마저 죽임으로써 그야말로 처절하게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런 네프가 살아가던 도시는 원래 밝고 화창해야 할 로스엔젤레스이지만 영화 속 그 곳은 낮보단 밤이 지배하며 살인마저 거리낌이 없는 우울한 도시일 뿐이다.

필름누아르는 비정한 현실과 뒤틀린 운명에 내던져진 남성 주인공의 궤적을 좇아간다. 꿈 같이 밝은 세상만 그려내던 고전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거친 현실에 눈을 돌렸고 환경적으로는 낮은 제작비 예산과 전쟁을 통해 발달된 야간촬영 기술에 영향을 받아 야간 시간을 활용하여 일련의 저예산 영화를 만들어내면서 필름누아르를 탄생시켰다. 스타일적으로는 전쟁 시기 유럽에서 유입된 영화 인력을 통해 표현주의적 기법이 반영된 영향도 있다.

필름누아르는 그저 요부가 등장하는 범죄영화로만 치부되기에는 그 이야기나 스타일이 너무도 매혹적인 대상이다. 단순한 장르를 넘어서 기존의 영화적 관습에 대항하는 하나의 움직임이나 흐름으로 분류되는 필름누아르는 이제 네오누아르 시기를 지나 영화의 전방위 영역에서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스타일로 스며들고 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중 배상은 일반적으로 한 사건에 대하여 보험금 지급을 중복해서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제목은 기차 사고로 사망할 경우 보험금의 두 배를 지급하는 영화 속 설정을 반영한 것이므로 본래는 ‘두 배 배상’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중배상'은 그 자체로 필름누아르의 또다른 이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제목에 관해 어떠한 흠도 잡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사진 출처=이중배상(Double Indemnity) 연출 Billy Wilder 제작 Paramount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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