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열네 번 째] 해장술 말고 해장차

김원경 승인 2021.02.25 09:23 | 최종 수정 2021.02.25 09:43 의견 0

엄마처럼 '깡'이 센 여자는 첨 봤어요. 

아들이 빨갛게 잘 익은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우아한 여자'도 있고 '현명한 여자'도 있겠고 하다못해 '깡마른 여자'도 있겠구만 하필 '깡이 센' 여자라니. 아들이 여자 운운하는 이야기를 할 만큼 훌쩍 자라 같이 와인을 마시는 사이가 된 것도 묘한 기분이지만 제 엄마를 떠올리는 이미지가 '깡'이라니 우습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기는 하겠다.
캐나다에 오고 처음 샀던 건물에 악명 높은 마약 딜러가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전 주인이 말없이 팔았다. 시세보다 가격이 쌌던 이유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기나긴 투쟁 끝에 그 악당은 결국 쫓겨났는데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이 목격한 것은 앞치마를 두르고 수세미를 쥔 채 매일 같이 악당의 아파트 현관을 벅벅 닦는 모습이었다. 동양 여자가 수세미를 들고 날마다 현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악당은 더 이상 약을 팔 수 없었다. 악당이 쫓겨나던 날 동네 사람들이 여럿 나와 손뼉을 쳐주었다. 우리가 '수세미 대첩'이라고 명명한  그 사건 이후 엄마는 깡이 센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도전하는 삶이 가치가 있다고 아들에게 대답했다. 아들은 이해하기 힘든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린다. 이미 볼이 빨갛게 와인 색깔이 되어버린 딸 소희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머무는 자'와 다시 '돌아오는 자' 가 있다면 나는 돌아오는 사람 쪽이다. 늘 떠나야 한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한 번 사는 인생이 더 풍부해질 테니까. 캐나다도 그렇게 왔나 봐. 

엄마는 캐나다가 무엇이 달라요?
딸이 와인을 한 병 더 까며 묻는다. 새로 만든 와인 맛이 좋다. 네 식구 술값을 감당할 수 없어 코스트코에서 와인 키트를 사다가 직접 만들곤 했는데 이번에는 새로 소개받은 와이너리에서 다른 포도 품종을 받아와 50병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마셔대면 3월이 되기 전에 동이 날 것이다. 

캐나다에 와서 확연히 다르다고 몸으로 느낀 것은 '시선 '에 대한 것이었다. 

일부, 혹은 다수의 한국 남자들이 빛의 속도로 여자의 몸을 훑는 것은 일상사였다. 심지어 말쑥한 신사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불쾌한 감정은 그저 하루 분량의 감정 중 익숙한 일부였다. 
캐나다 남자들의 무심하고 평화롭고 게으른 시선을 마주했을 때 조금 혼란스러웠다. 예의 바른 남자를 만난 운 좋은 하루라고 생각했지만, 카페를 열고 손님으로 온 몽튼 남자들을 보니 확실해졌다. 모두 그런 것이었다. 

한국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캐나다 사람들이 늘어나고 문화의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지만 여자를 훑는 시선만 놓고 보면 갈 길이 참 멀다고 생각한다. 

뇌와 눈알 사이의 거리는 고작 10센티미터 남짓이지만 머릿속에 있는 '고결한' 생각이 뇌 신경의 복잡한 회로를 통과하고, 안구를 통제하는 안면 근육까지 온전히 고상하게 내려오려면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는 사회적 학습의 과정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리 딸은 SNS에서 여자들 외모를 스스럼없이 평가하고 공유하는 한국 오빠들 때문에  오늘 또 상처를 받았다. 빈 병이 늘어간다. 

캐나다에서는 내가 여자라는 이름의 틀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아. 

사업을 내 이름으로 해보고 거친 거래도 여럿 해보았다. 정부 기관이나 은행을 상대할 때 여자라서 몸 사릴 일은 없었다.
그것이 시선이 관대한 캐나다라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떠나는 자'를 선택한 순간, 스스로 다른 몸이 되는 것이다. 나의 시선도 남의 시선도 다 달라졌다.
세상 물정 모르던 우아하고 깡마른 여자는 깡이 센 여자가 되었다. 

아침에 가게 창밖을 보니 프래이징 레인이 온다 . 
얼음비가 오면 찻집이 공치는 날이다. 미끄러우니 사람들이 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제 아이들과  거나하게 달린 탓인지 속이 쓰리다. 

어제 술자리에 끼지 않고 잠을 푹 잔 남편이 해맑게  에스프레소를 타왔다. 쓰린 속에 에스프레소가 들어가면 커피의 날카로운 입자가 위벽을 후벼 팔 것이다. 남편의 뇌와 사려 깊음을 담당하는 심장의 어떤 기관에는 회로가 연결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차를 고른다. 해장에 좋은 차는 많다.
따뜻한 차, 한 포트면 금세 힐링이 될 것이다. 

''Nourish of Soul ' 이 좋겠다.
일본 센차에  말린 오렌지와 생강을 넣어 만든 차다.
향긋한 오렌지와 매운 생강의 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탁월한 블랜딩이다. 
센차는 일본 차 생산량의 80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차로  햇볕을 마음껏 받은 푸른 찻잎을 증기로 찌고 비벼서 바늘 모양으로 말린다. 찌고 비비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아미노산의 일종인 테아닌이 풍부하고 깨끗한 맛이 만들어지는데 몸에 좋은 성분을 지키려면  60~70도의 낮은 온도의 물로 우려야 한다. 

영혼을 키운다는 차 이름이 그럴듯하다. 
Nourish of Soul이 내 쓰린 속을 타고 내려가자 위벽의 세포들이 생생하게 반응한다. 따뜻한 것이 흘러내린다. 이럴 때 위벽의 촉감은 참으로 예민하구나. 아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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