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열한 번 째] 놀며 벌며

김원경 승인 2021.02.03 13:29 | 최종 수정 2021.02.03 13:43 의견 0
차콜 색 스테인으로 마감한 벽
차콜 색 스테인으로 마감한 벽

우리 가게에 많이 오는 순서대로 손님들을 통계를 내보니 대충 이렇다. 

1. 패션 부심이 있는 멋쟁이 중년 여성 그룹
2. 새로운 문화에 흥미를 느끼는 20대 여성 그룹
3. 클래식한 티 문화를 사랑하는 할머니 그룹
4. 두 번째 항목의 여성을 따라온 20대 남성 그룹
5. 치마를 즐겨 입고 화장을 곱게 한 의외의 남성 그룹
6. 한류 영향으로 호기심에 오는 다양한 연령 그룹 

가게 열 때 앤틱과 빅토리아풍 미감을 즐기는 50대 여성을 주 타깃으로 놓고 설계했던 것에 비하면 연령대도 훨씬 내려가 있고, 예상하지 못한 공통 취향이 발견된다. 패션과 인테리어다.
우리 가게에 오기 위해 일부러 멋스럽게 차려입는 게 아니라면 유달리 멋쟁이들이 많이 찾아온다. 또 앤틱과 현대적인 디자인이 함께 있는 우리 가게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다. 

예를 들면 며칠 전 오신 손님의 경우. 

티 룸의 문이 열리자 '멋짐'이라는 것이 들어왔다.
화이트 러플 블라우스에, 검정 재킷, 그린 톤 체크 패턴 바지, 거기다 길게 목을 뽑은 화이트 부츠로 마감. 

서프라이즈다.
오 굉장한 패션 감각이네요. 대담하고 개성이 넘쳐요. 내가 경의를 표하자 손님이 자기 인스타를 보여준다.
파리에서 패션 포토그래퍼로 활동했다는 자부심 어린 대답에 걸맞은 감각적이고 멋진 사진들이다.
내가 쉬크한 배경에 클래식을 가미한 스타일이 좋다고 하니 자기가 추구하는 게 그렇다며 신이 났다.  들고 온 인테리어 잡지를 펼치며 나의 취향을 물어본다. 자기 집을 새로 꾸미는데 적당한 조언가를 만났다면서. 

우린 신나게 떠들었다. 이런 경우 대단한 영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 가리키는 사진에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소통이 된다. 우린 친구가 되었다. 

친구에겐 초콜릿 트러플 차를 냈다. 
세련되고 도시적이며, 흥청대는 파리의 뒷골목처럼  퇴폐적인 차. 
코코아와 마카다미아 견과류가 풍부하게 들어가 거의 액체로 된 디저트 같다. 
스팀 우유를 곁들인다. 그녀의 구릿빛으로 드러난 퇴폐적인 어깨를 하얀 쇼울로 살짝 가리듯 아슬아슬한 경쾌함이 찰랑댄다. 

어쩐지 처음부터 이 찻집, 인테리어가 달라 보였어.
친구가 보답으로 덕담을 한다. 

결혼 후 한국에서 일곱 번의 이사와 일곱 번의 인테리어를 경험하고 캐나다에 와서 내가 고른 건물은 아주 오래된 3층짜리였다.
남편이 펄쩍 뛰며 그렇게 낡은 건물을 어디다 쓰겠느냐며 반대를 했지만 내 머릿속에서 이미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으므로 멈출 수가 없었다. 

다운타운에 있는 그 주상 복합 건물은 위치는 좋았지만 오랜 세월 보살핌을 받지 못해 퇴락했고, 당연히 가격이 착했지만 아무도 원하지 않아 경매로 나온 물건이었다. 
내가 이 건물에 멋진 표정을 만들어 주겠어요 했더니 남편이 얼굴에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남편이 공사용 목재로 긴 테이블과 스툴을 만들고 있다
남편이 공사용 목재로 긴 테이블과 스툴을 만들고 있다

우선, 이 건물 외벽부터 바꾸고 싶었다.
오래된 캐나다산 벽돌의 질감은 좋았지만 몇십 년  빛이 바랜 불그스름한 색상이 우울하고 지친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철거하고 새로 쌓자니 많은 시간과 엄청난 공사비가 들게 생겼다. 잠도 오지 않았다. 

어느 날 건축 자재를 파는 홈디포에서 벽돌용 스테인을 발견했을 때 머리에서 전구가 탁 켜졌다.
가장 적게 손을 대고도 효과를 크게 낼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벽돌은 살리고 색만 바꿔보자.
페인트와 달리 스테인은 염료다. 바르는 게 아니라 염색하는 마감재. 벽돌은 표면에 미세한 틈이 있어 마치 천을 염색하는 것처럼 벽돌도 염색이 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스테인 한 통에 몇십 불밖에 하지 않는다. 

염색의 결과는 놀라웠다.
훌륭한 발색과 자연스러운 불규칙성.
벽돌의 숨구멍에 염료가 스며들자 자연스러운 느낌의 진하고 연한 차콜 색 고급진 새 벽돌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부러 한 장은 진하게 염색하고 옆의 것은 연하게 염색하며 리듬을 만들자 마침내 도회적이고 세련된 표정이 벽에 드러났다.
페인트 씹은 표정으로 벽을 바르던 남편이 이런 걸 어찌 생각했냐고 신기해하며 나보다 더 부지런을 떨었다. 처음에 삼천만 원 견적을 받았던 벽 공사를 단 3만 원에 마쳤다. 

벽을 염색한다는 발상이 놀랍다며 친구가 묻는다.
저 테이블도 직접 만든 거예요? 

이 가게의 모든 걸 남편과 함께 디자인하고 직접 만들었다. 인테리어 업자에게 맡기는 것은 한국과 비교해 터무니없이 비싼 탓도 있지만, 어디나 비슷비슷한 디자인이라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다. 

남편이 공구 다루는 법을 유튜브에서 배우는 동안 나는 그림을 그렸다. 반년쯤 지나 끙끙대며 대패질하는 남편의 모습이  얼추 목수 비스름해지자 오늘은 탁자 하나 내일은 선반 하나 식으로 깎아 나갔다. 다만 큰 단점이 있었다. 목수가 늘 툴툴거린다. 나사가 잘못 들어가면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값비싼 재료를 망치기 일쑤다. 그럴 땐 살살 구슬려 가며 못 하나 못 박던 사람이 캐나다 오더니, 목수 뺨을 치게 생겼다고 칭찬해주면 또 툴툴거리며 망치를 다시 잡는다. 

인테리어는 발견의 기쁨이다. 
새로운 재료를 발견하고 엉뚱한 쓰임새를 창안한다.
창조와 놀이가 있어 즐겁다. 건축용 2×4 목재를 다듬어 긴 탁자로 만들어 놓으니 손님들이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묻곤 한다. 뒷마당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잘라 액자를 만들고 흙 화분으로는 세면대를 만들었다. 

어찌 보면 우리 찻집에 오는 손님들은 차와 함께 분위기를 마시러 오는 것일 거다.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타인들과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서로를 발견하는 기쁨 또한 기대하며. 나는 그들의 무드에 맞춰 차를 골라내서 새로운 기분을 창조한다. 
이 모든 게 놀이이다. 

'놀면서 돈도 벌고'가 나의 꿈인데 캐나다에 와서 그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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