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열번 째] 말차의 푸른 맛

김원경 승인 2021.01.27 14:17 | 최종 수정 2021.01.27 15:15 의견 0

요가 선생님이 가게에 오셨다.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어깻죽지를 비틀까 봐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동양 문화를 좋아하셔서 금발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동양인 눈매처럼 스모키 화장을 길게, 짙게 했지만 어쩐지 그로테스크한 서양 몽크 같은 느낌이다. 

나마스떼. 진작 와보고 싶었어요. 

처음 요가 스튜디오에 가서 도도하게 매트를 펼치자 다른 수련생들이 동양인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동양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사 2번 자세' 정도는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을 거라고 여기는 듯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다들 지켜보고 있었다. 살짝 걱정되었다.  

선생님을 따라 괄약근을 조인다. 
다리를 크게 벌린 채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 
방정맞게 오도독 뼈 소리가 났다. 희미하게 비웃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선생님이 스모키 눈빛을 쏘아 수련생들을 보시더니 내게 오셔서 친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자세를 설명하시며 직접 보여주신다. 아하 간단한 동작이었네. 이렇게?
어깻죽지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아픈 건 더는 문제가 아니었다. 각기 춤을 추는 듯 삐걱거리는 나를 어떻게든 해보시려고 애쓰는 선생님이 애잔했다. 수련생들은 잡담을 시작하고 선생님의 스모키 눈매가 진해지고 있었다. 

선생님이 찻집 메뉴판 앞에서 고민에 빠지자 나도 고민에 빠졌다. '오도독' 한 인상을 만회할 찬스다. 동양 제자의 뼈마디 마디는 비록 무뎠으나 권하는 차만큼은 과연 동양 여자 다운 현묘한 선택이었다고. 

마차를 드세요. 옛날 동양의 스님들이 명상 수련을 할 때 드시던 차랍니다. 

마차, 한국에서 부르는 이름은 말차다.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일본에서 크게 발전하고 전 세계로 퍼진 차. 그래서 서구에서는 말차보다는 일본식 표현 "마차"라고 불린다. 

차나무에 새싹이 두 석 장 나오기 시작하면 햇빛을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일부러 차광막을 씌운다. 그러면 어린 잎들이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우선 햇빛을 더 받기 위해 엽록소를 두 배로 만들기 시작한다. 아미노산(감칠맛이 나는 성분)을 늘리고 카테킨(쓴맛이 나는 성분)을 줄이며 더 진한 녹색이 되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 과정에서 찻잎의 질긴 섬유질은 부드러워지고 햇빛 가림 막 아래 어둠 속 찻잎들의 고군분투는 진한 파래 향이 난다. 그 눈물겨운 어린 것들을 싹둑 따서 곱게 갈아낸 것이 말차다. 

나마스떼.
어쩜 초록빛이 이리 예쁠까요. 

선연한 초록빛, 곱게 간 일본 교쿠로 산 말차를 반 스푼 다완에 넣는다. 이제 중요한 격불 과정.
격불은 대나무로 만든 솔, 차선으로 말차를 물에 풀어 거품을 내는 과정이다. 차선을 단단히 쥐고 알파벳 M을 그리듯 힘차고 거칠게 다완을 저으면 마침내 고운 거품과 함께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나는데 생각보다 더 힘차고 거칠게 팔을 움직여야 한다. 
오도독 뼈 소리는 나지 않았다. 

찻잎 온몸의 차. 
밝음을 향한 끈질긴 생명의 차. 
가루가 되어도 잃지 않은 푸름의 뜻을 담아 선생님께 드렸다. 

나마스떼. 어쩐지 비장한 맛이네요. 

말차의 사연을 듣더니 선생님이 신기한 이야기라며 놀라워하셨다. 귀한 차를 마셨으니 명상이 잘 되겠다고도 하신다. 

코로나가 끝나야 다시 요가 스튜디오에 나가 각기춤을 출 텐데. 
몽튼에는 오늘 다시 빨간색 경보가 켜졌다. 
다운 타운 가게들도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임시로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나는 문을 계속 열기로 했다. 
엽록소를 두 배로 늘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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