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간도'로부터의 자유

장서희 승인 2021.01.21 17:23 | 최종 수정 2021.01.22 09:09 의견 0

범죄조직의 신참조직원 유건명(유덕화)은 경찰 내 잠입한 엘리트 경찰이자 조직의 스파이로, 경찰학교의 우등생 진영인(양조위)은 경찰이지만 범죄조직의 스파이 신분으로 살아가게 된다. 제자리에서 벗어나 거짓된 삶을 사는 두 남자의 대결을 다룬 이 영화의 제목 무간도는 고통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최악의 지옥을 가리킨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이들의 이중생활은 마치 무간지옥처럼 끝나지 않고 이들을 옭죄어 오고, 이들은 각자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갈등한다.

경찰학교장의 죽음으로 경찰 진영인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인물이 된 황국장은 잠입작전의 허상을 대변하듯 진영인과의 만남에서 유리창에 반사된 이미지로 등장한다. 카메라는 더 이상 견디기 힘겹다고 말하는 진영인을 마치 프레임 안에 배치된 사물처럼 촬영함으로써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조직을 위해 이용되는 수단으로 객체화한다.

반면 황국장과 유건명을 촬영한 투샷은 이러한 황국장과 진영인의 투샷과 완벽히 대조된다. 강박적으로 움직이던 카메라, 인물을 배경의 일부로 자리잡게 함으로써 인물을 비인격화헸던 샷과는 다르게 황국장과 유건명은 매우 안정적인 투샷으로 촬영된다. 아슬아슬한 진영인의 현실적 상황과는 대조된 유건명의 안정된 외적인 입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몇 번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유건명의 주도로 황국장과 진영인은 조직의 추격을 당한다. 빌딩의 좁은 계단으로 이동하는 황국장과 진영인을 담아낸 샷은 엘리베이터 로비로 들어오는 기울어진 앵글의 이동샷으로 이어지며 불안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끝내 황국장이 시신으로 바닥에 추락하면서 진영인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어 진한침(조직의 보스) 체포 작전에서 유건명은 자신의 보스를 사살함으로써 경찰로서의 정체성을 굳히고 경찰서로 복귀하지만, 카메라는 마치 끝이 아니라는 듯 오히려 불안한 앵글로 그를 잡아낸다. 그러한 유건명을 만난 진영인이 그가 스파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두 사람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그 직후 진영인을 만나러 가던 유건명은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메시지를 약혼녀에게 남겨 보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끝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제자리 걸음처럼 답답한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진다. 

진영인을 만나러 간 옥상에서 유건명은 도처에 비치는 반사 이미지 속에서 길을 잃은 듯 혼란스럽게 묘사된다. 진영인이 유건명을 제압한 데 이어 유건명의 부하경찰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팽팽한 대결구도가 조성되는 순간 푸른 하늘 한 컷이 삽입된다.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햇살을 잡은 이 하늘샷은 마치 한 폭의 종교화처럼 모든 것이 운명이라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운명처럼 진영인은 최후를 맞는다. 그 부하경찰 역시 조직에서 심어둔 스파이였던 것이다. 진영인의 시체를 두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풍경은 그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했던 진영인의 비극적 운명을 드러낸다. 그리고 세 명이 탄 엘리베이터가 하강하는 어두운 장면은 곧 무간지옥으로의 추락과 절망을 은유한다. 진영인을 죽인 부하경찰을 사살하고 혼자 살아남은 유건명은 엘레베이터에서 경찰 신분증을 내보이며 혼자 걸어 나온다. 마치 경찰 신분을 온전히 획득함과 동시에 홀로 지옥에서 빠져나온 모양새이다.

진영인은 사망 6개월 후 경찰신분이 인정되어 경찰묘지에 안장됨으로써 그렇게 갈망하던 정체성을 비로소 회복한다. 그의 묘비에는 ‘용감한 희생정신’이라고 적혀 있지만, 그의 죽음은 사실상 국가에 의한 개인의 비자발적 희생이었다.

이와 같이 국가가 개인을 비밀리에 수단화하여 희생시키는 일은 우리영화 ‘실미도’에서도 그려진 바 있다. 실제로 실미도 부대원들의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부대원들이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부대원들이 훈련의 위험성을 고지받지 못한 채 취업보장 등을 내세운 국가의 기망에 따라 지원했고 훈련 중 인권을 침해당한  점을 들어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또한 당시 국가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분리해도 은폐가 가능하고 가족들이 수소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이들을 중심으로 부대원을 선정한 사실도 인정했다. 단출하기 그지없는 진영인의 장례식을 봤을 때 이 영화가 이러한 기막힌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진영인의 죽음을 기리는 이 영화의 마지막 씬은 그 전까지 무간지옥의 유일한 생존자인 것처럼 그려졌던 유건명을 망원렌즈로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아웃포커스된 배경에 묻힌 유건명의 클로즈업은 이제는 그가 벗어날 수 없는 무간지옥에 갇혀 있음을 이야기해준다. 안락한 겉모습을 지녔으나 그 내면은 끝없는 분열을 거듭하던 유건명과, 자신은 선한 사람이라는 확신으로 밑바닥 삶을 버텨냈던 진영인. 이 중 무간도행의 진짜 주인공은,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음에도 그럴 수 없다고 체념했고 또다른 선택의 기회에서조차 선을 택하기를 포기했던 유건명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영화 속 진영인의 죽음은 단지 패배로만 단정지어져서는 안된다. 비록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서지만 진영인은 그토록 되찾으려 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그 끝 모를 무간지옥으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사진 출처=영화 <무간도>(2002)감독 맥조휘, 유위강,제작 Media Asia Films,Basic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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