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이 보이는 크리스마스: '찰스 디킨스의 비밀서재'

장서희 승인 2020.12.25 10:39 | 최종 수정 2020.12.25 10:49 의견 0

날씨가 추운 건 분명한 데도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리는 거리를 걸어본 기억은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낯선 계절이다. 겨울 추위를 잊게 할 밤거리의 불빛과 캐롤이 사라져버린 이 겨울의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귀가 아닌 눈으로 보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만나보자.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서재>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재조명한 걸작 ‘크리스마스 캐롤’이 탄생된 6주간의 과정을 환상적으로 그린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성공 후 슬럼프에 빠졌던 찰스 디킨스는 1843년 10월의 어느 밤 마주친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새로운 소설을 구상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타난 혼령의 도움으로 개과천선하게 되는 구두쇠 스크루지의 이야기이다.

찰스는 자신의 서재를 찾아온 스크루지의 환영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를 모험하면서 글을 써내려가지만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시점에 엔딩에서 그만 막혀버린다. 글 쓰는 데 방해가 된다며 친구와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준 찰스는 어둠을 틈타 어릴 때 일했던 공장터를 찾아간다. 고되고 굶주렸던 당시 기억 때문에 늘 괴로워했던 찰스는 그 곳에서 평생 미워해 온 아버지가 과거 '남의 짐을 덜어주는 사람은 소중하다'는 값진 가르침을 주던, 선의와 사랑을 가진 사람임을 깨닫게 되면서 마침내 자신의 어두운 내면과 이별하고 돌아와 소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은 하루밤새 벌어지는 이야기인 반면 영화는 6주간에 걸친 이야기임에도여전히 소설과 같이 밤부터 아침까지의 빛의 여정을 시각화하고 있다. 찰스가 집필로 고심하는 동안 화면은 마치 스크루지가 보낸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처럼 밝은 빛을 허락하지 않는다. 촛불 조명으로 어둑한 실내, 낮이지만 커튼에 가려 밝지 않은 서재, 어두운 밤거리와 더 짙은 어둠을 내뿜는 공장터 등 영화의 주요 무대들은 계속되는 밤의 시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긴 밤을 보낸 스쿠루지가 크리스마스의 밝은 아침에 새로 태어난 것처럼 찰스 역시 6주간의 밤을 보낸 후에 드디어 밝은 햇볕을 마주하게 된다. 서재의 창문 가득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마지막 챕터를 완성한 찰스는 이로써 어두웠던 과거와 안녕을 고하며 생의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다.

돈밖에 모르고 가족이나 동료는 안중에도 없던 스크루지는 실은 소설과 자기 자신밖에 몰랐던 찰스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었다. 찰스의 이중성을 알려주는 것은, 친절하고 여리지만 동시에 상처 뿐인 두 명의 찰스가 있다고 말하는 아내의 대사나, 찰스에게 위선자라고 꼬집으면서 자신을 그 영혼의 얼룩이라고 말하는 스크루지의 고백만이 아니다. 찰스가 아버지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엄포를 놓고 서재로 들어와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마치 투숏처럼 찰스와 거울을 동시에 보여주다가 재빨리 패닝을 해서 스크루지를 보여주며 숏을 끝낸다.

이처럼 하나의 숏에서 현실의 찰스와 거울 속 찰스의 내면, 그리고 그의 어두움이 집약된 스크루지가 동일한 사이즈와 위치로 차례차례 연결되면서 이기적이고 매정한 스크루지가 곧 찰스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형상화된다. 서재나 응접실 곳곳에 등장해 찰스를 비추는 거울 역시 찰스의 이중적 면모를 투영하는 미장센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비단 찰스나 스크루지뿐 아니라 다양한 등장 인물들의 모습이나 대사를 통해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의 면면을 보여준다. 하녀 타라나 찰스의 어린 조카 등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단역들까지 모자이크처럼 소설의 조각조각이 되어간다. 스크루지의 죽은 동업자 말리 역시 찰스의 저작권 침해소송을 맡은 변호사를 모델로 하고 있다.

저작권법의 기원을 1710년 영국의 앤 여왕법으로 볼 만큼, 저작권은 영국에서 오래도록 존중되어 왔다. 이에 찰스 디킨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1840년대 사람들은 그의 소설을 동의 없이 찍어내거나(복제권), 변경하는 일(동일성 유지권)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찰스 디킨스의 저작권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데 그 까닭은 저작권법이 창작자의 사후 70년까지만 저작권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크리스마스 캐롤'을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일 또한 자유롭게 가능해진  것이다.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의 2차적 저작물이라 할 이 영화에서는 소설의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대사들을 곳곳에서 직접적으로 인용하기도 하고, 동일성 유지권에 구애됨 없이 소설 내용을 유연하게 변용하며 비틀기도 한다. 이와 같이 영화 속에 퍼즐처럼 흩어져 있는 소설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보는 것 또한 유난히 조용한 이번 크리스마스를 보다 풍성하게 해줄 유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서두에서 스크루지의 조카가 말한다. ‘크리스마스는 친절, 용서, 나눔, 즐거움의 절기’라고. 예년의 들뜬 분위기는 느끼기 어렵겠지만 이번 크리스마스 역시 우리에게 친절, 용서, 나눔 그리고 즐거움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꼬마 팀의 바람처럼, "우리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사진출처=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서재 The Man Who Invented Christmas>, 제작: Mazur/Kaplan Company, The Mob Film Company 감독: Bharat Nalluri 수입:kth(2017))

저작권자 ⓒ OBSW,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