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 이야기 네 번째] 미소짓는 차

김원경 승인 2020.12.15 13:16 | 최종 수정 2020.12.15 13:26 의견 0

한쿡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캐나다 남자. 지난 번에 '사랑의 불시착' 같은 드라마 또 없냐며 한국 드라마를 추천해 달라던 그 손님이 다시 오셨다. 드라마는 잘 모른다고 하자 큰 눈을 껌뻑이더니 이번에는 'BTS'의 뮤직비디오에서 자기가 찾은 상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한류는 어느덧 캐나다 동부의 끝 작은 마을 찻집까지 와 있다.

오늘은 블랙핑크에 관해서 물어보려나 하고 있는데 갑자기 훅 들어온다. 
"어떤 차가 좋은 차에요?"

무엇이 좋은 차일까.
세계적인 3대 블랙티라고 칭송 받는 중국 기문차, 인도의 다르질링, 스리랑카의 우바 중 하나라고 해야 하나?

발효가 많이 된 순으로 보이차-블랙티(홍차)-우롱차(철관음)-녹차-백차의 차례니 좋아하는 산화 정도에 따라 고르라고 해야 하나? 

세포 손상을 예방하는 산화 방지제 카테킨은 가장 많고 카페인 함량은 가장 적으니 녹차와 백차가 건강에 가장 좋다고 해야 하나.

" 취향에 따라 다르지요. 어떤 차를 좋아하세요?" 
"그걸 모르겠어요"

나도 그랬다.
좋은 차를 찾기 위해 무려 공부를 하던 때가 있었다. 원산지별, 제조 방법별, 블랜딩 방법별로 가지 수도 많았다. 

토론토에서 열린 차 엑스포에도 갔다. 세계 각국의 잎 차와 커피 원두를 들고 부스를 차린 수백 개의 업체들이 시음을 권했다. 세상의 모든 차를 다 마셔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한껏 들떴지만 반 바퀴를 돌기도 전에 미각에 홍수가 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뱃속에서 커피와 차가 출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 차 공부는 왜 이렇게 어려워.

게다가 똑같은 차라도 어떻게 우리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 하니 겁이 났다. 

3g의 차를 300CC의 물에 3분 동안 우린다는 삼삼삼 법칙에 따라 차를 끓인다. 온도는 95에 맞추려고 온도를 설정할 수 있는 디지털 포트를 사야 했다.

"잘 못 잤어요.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보면 한 편에 끊을 수가 없어요" 
좀비처럼 피곤한 말투다.

"뭘 보시는데요?" 
"킹덤이요"

이 손님 요새 치유가 힘들다는 한쿡병에 걸리고 말았구나. 하지만 그 덕에 한국인 찻집을 찾아주니 나도 덕을 본다. 이 손님, 어떤 차가 좋을까?

원을 크게 그려 놓으면 어디를 봐야 할 지 몰라 어지럽다고 한다. 하지만 원의 아무데나 작은 점 하나를 찍어 놓으면 순간 그 점을 중심으로 방향과 거리가 생겨서 어지럽지 않게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 내가 서 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타들어 가는 목마름. 그러나 우물이 있는 한 점을 찍을 수 있다면 이제 목마름은 거리 계산 문제가 된다. 방향이 생겼으니 참을성 있게 걸어가면 오아시스를 만날 것이다.

문제는 점 하나를 갖는 것이다.
차의 품종이나 이름을 보지 않고 나의 눈과 코와 입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느 날 차를 따르는데 색깔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쳐다봤다. 정갈하고 투명한 엠버, 찻빛이 좋으면 우선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머스킷 향이 그윽한데 호들갑스럽지는 않다. 한모금 마셔본다. 과연 몸 구석구석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점이 생겼다.

TWG에서 만든 차 중 하나였다. 이제 이 차보다 빛이 붉으면 블랙티 쪽이고 연하면 화이티 쪽이다. 방향성이 생겼다.
향기로 보아 가향차다. 추가 재료를 살피면 원 차와의 거리를 알 수 있다. 
이 차보다 맛없으면 맛없는 차고 이 차보다 맛있는 차면 더 좋은 차다. 

나의 좋은 차 구분법은 이렇다.
나도 모르게 미소짓게 하는 차.
편견 없이 첫 느낌이 좋다고 느끼면 그 차에 관해 공부한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의 하루 일과가 궁금해지는 것처럼.
어디 출신(품종)인지 무슨 옷(제다, 가향)을 입는지 어느 회사(브랜드)에 다니는지는 나중에 새로 반할 사람을 알아보는 걸 거들뿐.

첫 느낌은 너무 주관적인지 모른다. 하지만 맛에 객관이 있는가? 객관적인 사랑이 존재하는가.

손님에게 권한 차는 루이보스다. 
카페인이 없어 젖먹이 아기들에게도 주는 차.
남아프리카 고산 지역에서 자라는 침엽수를 원주민들이 약으로 쓰던 차인데 붉은빛이 압권이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연달아 보느라 지친 그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돌려줄 것이다.

Bill Evans의 Peace Piece를 앰프에 올린다.
차는 빛과 향, 맛으로 세 번 마신다지만 귀로도 마신다.
에반스의 첫 마디, 투명한 멜로디가 손님의 붉게 물든 찻잔을 터치한다. 그가 내 쪽을 보고 웃는다. 차가 좋다는 걸까 음악이 좋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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